킨제이는 ‘남성 불감증’을 눈치 채고 있었다 남자가 사회 통념과는 다른 ‘자신의 성을’ 이야기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오로지 ‘여성’ 위에 서서 남성다움을 과시해야 한다. 만약 남자가 남성 성을 회의한다면 사회로부터 ‘남자 구실 못 하는 놈!’ 하는 식으로 심판받을 것이다. 사회 분위기뿐 아니라 ‘과학’마저 남성의 성 담론을 구석에 몰아넣었다. 킨제이는 1948년 ‘남성의 성 행동’ 을 펴내면서 섹스의 절정감을 ‘오르가슴’으로 명명하기 시작했다. 이때 육체적인 ‘오르가슴’과 ‘오르가슴이 가져오는 쾌감’을 분명히 구분했으며 나아가 성적인 만족감에는 여러 단계가 있고 사정해도 거의 쾌감을 동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이렇듯 킨제이는 ‘남성 불감증’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나 킨제이는 연구상 편의를 위해 그 “생리학적/심리학적인 다양성은 일체 무시”(Alfred C.Kinsey et al., Sexual Behavior in the Human Male, 1948, pp.159～160)한다. 이후 사정=오르가즘=성적인 절정감이라는 ‘공식’이 일반화되었고 ‘남성 불감증’ 문제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과학’으로 공인된 공식은 대중에게도 퍼졌고 이후 회의된 적이 없었다.
‘내’ 이야기로 시작하는 까닭 그런데 글쓴이는 지금까지 남성에 대한 논의는 모두 ‘남성 일반’을 상정한 상태에서 진행되어 결국 그 안에서 개별적인 남성들의 실제적인 체험과 생각이 모두 사라져버렸음을 지적한다. 사회 분위기와 어설픈 과학 지식이 오히려 남성 개개인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차리리 ‘나’의 체험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만이 이런 일반적인 남성론에 대한 정당한 반론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글쓴이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이런 태도는 진정한 여성의 욕망과 목소리를 찾기 위해 여성인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 페미니즘의 방법론 ‘경험읽기’와도 겹친다. 여성이 절실한 체험을 되새기며 사회 권력 관계와 이데올로기에 가린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가듯 남성인 글쓴이 또한 ‘나’에서 출발해 자신의 성과 남성 성의 진상에 다가가고자 한다.
남성의 성적 욕망, 페미니즘, 젠더, 섹슈얼리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 2005년 2월 이 책이 일본에서 나오자마자(일본어판 출판사 찌꾸마신쇼는 일본에서 고답적인 인문사회과학서를 다루는 출판사로 정평이 나 있다) 인터넷에 300개가 넘는 서평과 댓글이 달리며 격론이 일어났고 심야 성인 방송까지 곧바로 그 내용을 써먹었다. 옮긴이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이를 곧 한국에 소개했을 때 한국의 블로거들 또한 ‘완역’을 주문하며 논쟁을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반향이 일어났을까? 한국어판 원고를 읽은 김신명숙도 고개를 끄덕인 바이지만 남성인 글쓴이가 ‘나’를 주어로 해서 성에 대해 말한 경우는 정말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말하는 바는 비법을 지닌 변강쇠의 무용담이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남자가 차마 말하지 못했던, 부끄러움·당혹스러움·좌절·치사함·비열함 따위가 얼키고설킨 남성 성의 면면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담론을 끌고 간다. 여기에 남성은 이렇다, 여성은 이렇다고 단정하지 않았으므로 실은 마음 깊은 데서 ‘성’을 회의하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직하게 돌아보자, 진지하게 따져보자 1) 남성이 스스로의 불감증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여성에 대해 공격적이 된다든지 소녀의 몸을 지배하려는 욕망에 시달리게 된다. 사정 이후의 무기력, 추락감을 느끼더라도 상대방과 느낀 감정의 교류야말로 쾌락에 대한 잘못된 강박을 해결할 수 있다. 인간의, 남성의 조건을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2) 남성의 몸은 더럽다는 의식을 극복하고 ‘나’의 상황을 찬찬히 살펴보아야 한다. 예컨대 ‘소녀의 초경은 축하받을 일이지만 몽정은 불결할 뿐이다’ ‘내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자랐다는 감각엔 거리낌이 없지만 자위를 하고 있는 아버지는 상상하기가 싫다’는 따위 의식이 남자가 남성을 돌아볼 기회를 아예 막고 있다. 3) 섹스에서 얻을 수 있는 쾌락이 통념보다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환상을 버리지 못한 남성은 성폭력, 성범죄, 롤리타컴플렉스 들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4) ‘남성다움 회복’ ‘남성성’을 강조하는 담론이 실제로는 조작된 남성성을 강요한다. ‘나’에서 출발해 정직하게 남성 성의 근원적인 문제를 바라보자. 아울러 현실의 성 문제를 결코 무시하지 말자. 5) 아울러 고대 또는 동양의 섹스 비법을 ‘남성 불감증’ 극복의 대안으로 삼는 데에도 분명히 반대한다. 목적 없는 섹스 테크닉, 극단적인 쾌락이 목적이 되어 버리는 성 행위는 성 문제를 풀기보다는 오히려 더 끝없는 쾌락의 추구라는 악순환에 걸려들 것이다. 쾌락을 통해 구원을 얻을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그렇게 강렬한 쾌락을 추구하게 된 남성 성의 메커니즘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자칫하면 “쾌락의 추구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권력과 욕망의 추구로 변화하는” 상황에 빠지지 않기 위해, 성적 쾌락의 문제를 단순히 테크닉의 문제, 혹은 성적 개방의 문제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라고 힘주어 말한다.
‘너’나 그렇지 ‘나’는 그렇지 않다 | ‘일본’이나 그렇지 ‘우리’는 그렇지 않다 이 책은 분명 저자의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동시에 일본 사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의 지적은 일본 사회라는 특수성을 넘어서서 성 문제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통찰력을 선사한다. 이 책이 다룬 ‘남성 불감증’ 문제 및 포르노·제복 모에·롤리타콤플렉스 들은 지금까지 공공연하게 논의된 적이 없다. 이런 것을 처음부터 ‘일본적’ 혹은 ‘병리적’이라고 젖혀버리고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글쓴이는 ‘남성은 이래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돌파하기 위해 철저하게 ‘자신의 체험’을 깔고 논의를 펼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개인 경험을 늘어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글쓴이도 말했지만 섹스 상품, 섹스 매체는 이미 폭발적으로 증가해 대중화·세계화되어 이미 전 세계적으로 소비되고 있다. 일본식 포르노 이미지, 동영상은 한국과 전 세계에서 다른 어떤 상품보다 인기가 높다. 이는 이제 한국에서나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이 책이 걱정하는 욕망을 지닌 남성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쓴이의 우려와 문제 제기를 ‘일본 사회의 특수성’ ‘병리적인 소수의 문제’라는 식으로 덮어버리고 만다면 남성 성과 뒤틀린 성적 욕망의 문제와 그 심층에 있는 성의 심리학, 사회학 들을 결코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특수한 성적 기호記號들에 대해 반응하거나 그를 욕망하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성적 욕망은 근본적으로 동물적인 부분과 문화적인 부분으로 구성되며, 그렇다면 이 책에서도 나오는 다양한 성적 기호記號에 흥분하는 것 자체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단죄할 수는 없다. 글쓴이는 오늘날의 남성들에게서 인간의 성적 욕망에 자리한 양면성을 인식하는 능력,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이다. 이 책은 ‘단죄’가 아닌 ‘성찰’을 촉구한다.
남성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그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성의 동반자들을 위해… 글쓴이 책을 내고 나서 많은 일본 남성으로부터 뜻밖에 ‘모리오카의 논리는 이미 너무나 익숙한 것이다’라는 반응을 접했다고 한다. 현재 40대 중반인 저자는 19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으나, 1990년대에 청춘을 맞이한 30대 이하의 일본 남성들에게 있어 이 책의 내용은 이미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지금까지 그들이 느꼈던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라는 의견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에 견주어 유교적 윤리가 여전히 사회 전반에 남아있고, 징병제라는 제도를 통해 남성성이 강조되는 한국 사회에서야말로 이 책이 가져올 반향이 더욱 크지 않을까, 옮긴이는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다. 자신의 몸과 성적 욕망에 대해 단 한번이라도 고민한 적이 있는 모든 남성들과, 그런 남성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그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성의 동반자들(여성을 비롯한 모든 성적 소수자들을 포함한)이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 만들기, 그것이야말로 글쓴이가 바라는 바이다.
총 
바보 빅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