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연(緣) 손 다시 눈길을 주다 /초대하기가 그리쉬운가 마지막 생일 선물/엄마의 부끄럼/오월은 역시 비싼 밥값을 입술이 내다/편지 한 통/정성을 훔치다 출생신고
2장 자화상 내 문학의 씨 토씨/나는 나를 놓고 싶다/내 삶을 수선하다 어쩌랴 이게 다 내 취향인데/보호색/물끄러미 마지막 통관의례/특별의식/어른 속의 아이/꾀병
3장 사랑 마지막 물고기/ 칼갈이 데이/소통 생명사랑/믿음/혼자만의 반창회/웃음공부/원본문집
4장 관계 붙어살기/연평 굴비와 고등어/선풍기/정희언니 그 사이에 있고 싶다./흑장미 백송이/행복 곳간 평생철부지/가발과 삭발/그 아이
5장 행간 소소한 황홀감/행복을 낚다/팥알보다 작은 비밀 찰라적 이웃/일상의 아름다움/열고 닫다/꿈꾸는 자유 반납한 공일/변신
아라한(AROUND hundred)세대가 출판계와 독서계를 강타하며 100세 할머니들의 베스트셀러 작가들을 탄생시키고 있는 일본처럼 한국도 곧 독서와 출판시장은 실버들의 세상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따라서 문학의 꿈을 잠시 접어두었던 은퇴자들을 작가로 발굴하고 작품집을 출간하는 차별화된 사업을 펼쳐나가야 한다. 에에 걸맞는 조경숙 수필가는 책을 읽고 사색하고 글을 쓰는 전형적인 아라한 유망주다. 아무리 천재라도 즐기면서 꾸준하게 노력하는 사람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가수도 노력으로 목소리를 만들어나간다고 하는데 작가는 더더욱 자기만의 완성된 세계를 이루려면 날마다 단련하는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산문작가는 앞으로 은퇴자들의 자아 찾기에 훌륭한 안내자가 되어 줄 것이다.
[책 요약] 나이 칠십에 한 번 쯤은 나를 돌아보아도 되지 않을까. 강상중 교수는 ‘분명한 것은 과거는 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확실하다. 따라서 내 인생은 내 과거이다. 그러니 더 좋은 과거를 위해서 오늘을 충실히 살자’고 했다. 나도 오늘을 충실히 살기 위해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고 재충전하고자 한다. 내가 제목을 「나를 초대 한다」라고 한 것은 내 인생의 주인공을 나로 확실히 못 박고 싶어서였다. 나를 먼발치에서 오롯이 만나고 싶었다. 책 전체 흐름의 대 전제는 사랑이다. 그 갈래를 여섯 개의 장르로 분류했다. 세상에서 나를 있게 한 연(聯)을 첫째로 꼽고 싶었다. 두 번째는 나의 내면을 구성하고 있는 도도히 흐르는 의식이나 취향을 살펴보며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었다. 세 번째는 이 글 전체의 주제인 사랑을 일상에서 소소하게 찾아보고 싶었다. 네 번째는 이 책의 확실한 주인공인 내가 최소한 어떤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하는지 살피고 싶었다. 다섯 번째는 매일을 살아가는 일상을 아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며 나를 알고 싶었다. 여섯 번째는 행간(行間)으로서 분주하게 바삐 살아가는 나의 시간 속에서 나를 재발견할 수 있는 틈새라고 할지 삶의 여유라고 할지 숨어 있는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 한 장르에 열 개 정도의 소주제로 나누었다.
제 1장 어렵기로 말하자면 내가 제일 그랬지만 시어머니 될 분도 음식을 나르는 범위는 지극히 한정이 되어 있었고, 젓가락을 들고 이리 저리 옮기는 모습도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어느 한 순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면장갑을 뺀 맨손이 확 들어왔다. 내일이면 눈부신 오월이 시작되는데 그 분의 손은 아직도 얼기설기 터져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키울 것인가. 사람을 키운다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벅차면서도 가치 있는 일이다. 세상의 모든 어른들은 내 아이뿐 만 아니라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들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왜냐면 그들을 세상에서 가장 험난한 잔칫상에 초대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초대받은 모든 아이들은 당연히 축복받아야하고 당연히 정중한 대접을 받아야한다. 왜냐면 소설가 도스토옙스키의 말대로 삶은 선물이고 행복이니까. 여름엔 개량 모시 한복으로 단아한 자태를 뽐냈고, 어디를 가든 경우 밝고 사리가 분명했던 어머니, 곱고 예쁜 할머니로 어디서든 통했던 어머니가 세상을 거꾸로 가고 있었습니다.
너무 오랜 동안 혼자 사셨던 것은 아닌지, 그 때 그 일은 무시로 나를 아리게 한다. 그 때 내 나이 마흔이 채 되지 않았고 엄마는 예순을 넘었다. 아기도 아닌, 불혹을 앞 둔 나이에 탄력 있는 엄마의 젖가슴과 등을 본 경이로운 경험은 이상하리만치 아픈 영상으로 생생히 남아있다. 엄마는 왜 그때 그렇게 후다닥 놀라며 부끄러워하셨을까? 나는 엄마의 지나온 세월에 대해서 한 번도 물은 적이 없다. 엄마는 그 험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왔느냐고, 어떻게 전쟁을 겪었고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고 묻고 싶다. 칠순이 되 가는 이제야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딸의 글이 어떠냐고 평가도 받고 싶고, 엄마 같으면 어떤 소재로 쓰고 싶으냐고 묻고도 싶다. 엄마가 꼭 읽어보라고 했던‘오생’이라는 일본 소설은 아직도 읽지 못했고, 젊을 때 감명 깊게 읽었다던‘북경에서 온 편지’를 다시 구해달라고 했는데 그럴 기회도 다 놓치고 말았다. 늘그막에 글을 쓰게 되면서 이제 겨우 삶과 인간과 특히 엄마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기 시작했는데-.
그날 내 입술이 비싼 밥값을 대신했다. 모든 행위가 사전에 준비된 시나리오에 의해서 행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괘씸하지는 않았다. 사랑은 작은 입맞춤에서 시작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결혼했다. 달작지근하면서도 연약하고 한없이 부드러웠던 첫 키스가 늘 좋았다. 어떤 진한 키스보다 상큼하고 달콤했다. 지금도 딱히 싫지는 않지만 마음이 썩 동하지 않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엄마가 마루 밑에 숨겨 두었든 꿀단지를, 날마다 한 숟가락씩 몰래 퍼 먹든 꿀맛 같던 시간이 흘렀다. 텅 빈 꿀 항아리 같이 아무런 감흥이 나지 않는 세월이 야속하다.
不足 (부족)은 그 人生(인생)을 奮發(분발)시키고 기럼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 나는 항상 이 대목에서 숨을 고른다.
어머니의 정성을 훔친 나는, 김밥을 마주대할 때마다 “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김밥은 정성이야.”를 실천하시던 어머니의 경건한 모습과 함께 삶의 자세를 가다듬게 됩니다.
훗날 출생신고를 기쁘게 해 주었던 그 부모가 연로하여 전혀 미동이 없을 때 그 때는 거꾸로 그 자식이 부모의 파란만장한 한 생의 주기가 완전히 끝났음을 애도하며 신고해 줄 것이다. 내 의지로는 절대 불가능한, 누군가가 대신 신고해 줄 수밖에 없는 탄생과 죽음, 돌고 도는 삶의 이치가 경이롭다. 우리가 겸허하게 살아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범선이 그렸던「오발탄」, 바로 그 시대의 한 가운데에 서 있던 정희언니가 어디서든 살아 있기만을 빌 뿐이다.
제 2장 이제 쪽지 글이 아닌, 나이 칠십 즈음에 글을 써 보려고 하는데 나는 과연 문학적 글을 쓸 수 있을까. 하필이면 왜 지금에 와서야 비행사 같은 치명적 경험이 부러운 것일까. 행여 다음 세상에서 자기를 완전히 놓아버리고 신들린 것 같이 노는 여자를 만난다면 그것이 바로 이승에서의 나였다고 기억해 주면 고맙겠다. 내가 두렵고 슬픈 것은 수선 집 아저씨의 슬픈 표정 때문이 아니라, 바람한 점 들어오지 않는 비싼 방한복 때문이 아니다. 늘 뒷북치며 아파하면서도 수선되지 못하는 이런 일들이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속절없이 또 한 해가 간다. 교양 책인 「아픔이 길이 되려면」만 애ㅤㄲㅜㅊ게도 자꾸 펼쳤다 덮었다한다. 그런데 어쩌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샘’이라고 말해도 나는 ‘선생님’이라고 쓸 건데. 이게 다 내 취향인데…. 어쩌면 취향은 나의 정체성인지도 모른다. 험난한 세상에 인간이 어떤 보호색을 갖고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는 각각 자신의 몫이라고 본다. 나는 계속 그 색으로 무장을 할 수밖에 다른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다. 서른여덟에 남편과 사별한 후배K가 아이 셋 모두를 짝짓기 사업까지 훌륭히 마무리 짓던 날이었어. “ 너, 참 장하다.”고 자기 이름을 나직이 부르며 머리를 쓰다듬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어.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의 충격은 생리를 바로 끊기게 했다는 그녀의 절절한 삶이 나를 아리게 했어.
“자기가 생전에 소유했던 물건을 유품정리사에게 맡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야. 그 물건들은 본인이 살아있을 때 유효할 뿐, 그 이후엔 버려야 할 쓰레기에 불과해.” 날이면 날마다 한 두 개씩을 처분 했다. 별로 아름답지도 않았던 삶의 뒷모습을 죽어서까지 남에게 보인다는 일은 속살을 송두리째 드러내는 것이라던 고모는 진작 인생을 터득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무한 장수시대에 남겨진 우리들에게‘집안의 모범답안’이라면서 비움의 실천을 숙제처럼 던지고 갔다. 자기가 자라온 성장문화는 늘 삶의 지지대로 남아 있다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공간은 마음이 담기는 그릇’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이들은 오히려 어른이 되어 담임을 코치하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속엔 어른 속에 아이가, 아이 속에 어른이 동그마니 앉아 있기도 하나보다. 한 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에너지의 80%만 소요하고 살았다면 전력질주 한 삶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머지 20%의 에너지를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삶의 깊숙한 곳에 비축해 놓았던 것 같다. 그것은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마치 진짜인 것 같이 혹시 위장한 채 여태껏 살아 온 것이 아닐까?
3장 사랑 나는 용기를 내어 과감히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어느 날 흰둥이가 내 옆에 동그마니 앉아 내 손등 위에 자기 손을 살포시 포개고 있었다. 눈길이 교감하고 있었다. 순리대로 산다면 내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 내게 주어진 만년 총무의 역할은 바짝 긴장하여 이 모임을 끝까지 붙드는 데 있다. 이제 나는‘평생 총무’라는 고단한 삶마저 사랑해야 하고 아껴야한다. 「물고기가 마지막으로 보는 것은 물이다」라는 말처럼 나는 이 모임의 마지막 물고기가 되어 물을 볼 것이다. 칼이 뜨거운 물건인지 차가운 물건인지를 늘 분간하기 어렵다하면서도 한평생 칼을 옆구리에 끼고 살았다는 이순신 장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칼로써 지켜내야 하는 이국종 외과교수, 평생을 칼갈이로 살아온 이 칼갈이 아저씨에겐 칼은 언제나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 그 자신의 생명 이상으로 소중히 다루어졌을 것임을 나는 안다. 그런데 아홉 살짜리 아이에게는 말해야 될 것 같았다. 그 아이는 나의 눈을 맞추며 같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쩌자고 나는 이 어린아이에게 위로를 받고 싶은 걸까. 하루에도 수없이 쉽게 밟히는 하찮은 벌레와 풀들까지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순전히 세상에 태어난 단 한 번뿐인 기회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스물다섯 살의 빛나는 청춘들아! 피동적이면서 한 길 밖에 모르던 우리 때와는 달리 지금은 다양성과 창의성과 융합의 시대라고 하잖아? 그나마 다행이야. 네가 좋아하는 일을 스스로 찾고 선택해 봐. 요즘 유행하는 수저 타령 같은 말은 행여 입에도 담지마라. 세상은 변했다고 하지만 젊은 날의 시련은 몸과 마음을 단련시키고, 부족은 인생을 분발시킨다고 나는 믿고 있어. ‘아프니까 청춘이다 ’ 라는 말로 괜히 열 불나게 하려는 게 아니야. 인기드라마‘미생’의 대사 중에‘시련은 셀프(self)’라는 말이 크게 다가오더라. 부디 건투를 빈다. 정 보고 싶으면 밴드에 가입할게. 누구말대로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웃음을 잃어가는 과정이라고 하던데. 석영중 교수 말처럼 그냥‘삶’이 아니‘살아있는 삶’을 살아 낼 수 있을지. 어쩔거나, 중요한 것은‘평생을 학습한 나의 웃음공부가 세월과 함께 맥없이 무너지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이 문집은 온 사람이 기억할 필요도 없고 또한 두루 읽어야 할 작품도 아니다. 단지 이 세상에서 인연 맺은 그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유일하게 기억해 줄 담임에게만 최고의 가치가 있을 뿐이다. 열렬히 사랑했던 징표로, 그것도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날까지만 유효할 것이다. 닳고 닳을 때까지 읽다가 혹시 딸이 원하면 유품으로 남겨 줄 수 있을 런지, 다만 엄마가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았던 흔적이라고 전하면서. 그러나 멍순이의 임종을 지극정성으로 지켜 준 것은 바로 멍돌이였다. 정든다는 일은 끝까지 책임지는 일이다. 사람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던 신뢰를 멍순이한테만 보내던 멍돌이는 배우자를 잃은 상실감이 너무나 컸다.
4장 관계 존스타인벡의 소설「생쥐와 인간」에서 ‘별 뾰족한 수가 없어서’ 라고 손치더라도 최소한 나의 존엄성은 내 스스로 지켜가고 싶다. 아무리 늙고 병들어도 구차하고 비루하게 살고 싶지 않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이다. 빌붙지 않는 나의 ‘존엄한 죽음’은 아마도 내 삶의 마지막 목표가 될 것이다. ‘ 고등어야, 자네한테 정말 미안하네. 내 마음 속엔 늘 네가 조기보다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어.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그것을 먹는 사람조차에게도 그랬었지. 선입견 때문에 입에 대 보지도 않고 무조건 밀어냈고. 내 맛과 다를 수도 있고 내 생각만 옳은 것도 아닐 텐데. 결국은 어미의 유별난 편식은 아들들에게까지도 대물림 되고 말았지. 긴 세월 돌아보니 미안해 할 일이 한 둘이 아니구나. 고등어야, 에미 야, 정말 미안하다. 정말.’ 나에 대한 진짜 모습은 보지 못한 채 그것들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했다. 그런 날 들이 다 지나고 명함에 새겨진 영혼 없는 글들이 부질없다고 생각할 즈음 바람의 강도는 한결 수그러들 수밖에 없어졌다. 세월이 갈수록 몸과 마음이 냉랭한 바람을 감당하기가 버겁다. 침묵하고 쉬어야 할 시간이 필요한 우리 집 꼬마선풍기같이. 언니가 사라진 텅 빈 골목길에서 혼자 동그마니 앉아 펑펑 울던 오래전의 내 모습이 왜 하필 지금 떠오르는 것일까. 나는 끝까지 사람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며 온전히 살고 싶은데.
외모도 성격도 많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것 하나는 확신한다. 나에게 돌발 사고가 생긴다면 삼십년 전과 똑 같이 용기를 낼 것 같다.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우선은 믿고 보는 거다. 그러나 니체는 ‘인간은, 행동은 약속할 수 있으나 감정까지 약속할 수는 없다.’ 고 말했다는데….
새해에는 우리 더 바르게 사는 거야. 알았지?’ 간절히 기도하면서 연신 셔터를 눌렀다. 그 아이의 성장 모습 하나하나를 스마트 폰 앨범에 차곡차곡 담아두고 있다. 언젠가는 그 아이 앞에 깜짝 선물로 내어 놓을 것이다. 커플 한복 한 벌 없고 그렇다고 진달래꽃을 머리에 꽂아 줄 감각 있는 남편도 아니다. 쌓인 낙엽을 짓궂게 던질 마당도 없고, 눈 쌓인 마을공원에서 젊은 날에도 하지 않던 눈싸움을 새삼스럽게 지금에서야 한다면 망령 났다고 할 수도 있겠다. 미리 받은 흑장미 한 두 송이로 겨우 만족해야 하는 그 날들이 아득하다. 손 때 묻은 세간들이 빠져나간 썰렁함도 있었지만 엄마의 손맛이 사라진 자리는 벼 이삭을 다 베어 논 가을걸이 논 같이 삭막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따끈따끈하면서도 고소하고, 매콤하면서도 달짝지근하며 입맛 다시던 풍성한 공간이었다. 선생의 점심도시락을 고사리 같은 아이 편에 들려 보내다니, 게다가 아이들은 찬밥을 먹는데. 지당하고 또 지당한 말이었다. 장식이나 치장이 하나도 없는 대학 일년생 스무 살의 얼굴은 청순하다 못해 풋풋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자연그대로의 민얼굴에 민머리의 아기 같은 얼굴이 내 지척에서 곤히 잠들고 있었다. 청순함 그 자체였다.
5. 일상 작은 황홀이란 말도 있는가. 소소한 황홀감이란 표현도 쓸 수 있는가. 긴장하며 살던 그 오십년의 세월을 다 던져버리고 황혼 길에 스물 살로 돌아간 그 카톡방을 나는 끝까지 애정을 갖고 지킬 것이다. 단, 더 이상의 성장은 없기다.
어마마한 교보문고 빌딩 위의‘광화문 글판’에 띄운, ‘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가 없다. 저안에 태풍이 몇 개 ~ ’라는 명시를 특별시의 온 시민들이 다 느끼도록 높이 걸어놓은 그 사옥 주(社屋 主)와 올망졸망한 작은 동네의 작디작은 신축빌라 자기 집 앞에 걸어 놓고 세든 사람들과 이웃들을 사랑할 줄 아는 그 건물주를 나는 존경한다. 바로 그때였다. “쟤, 젖꼭지 좀 봐 .” 아이들은 소리친 그 남자아이를 일제히 쳐다봤다. 그리고는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눈길의 끝에 바로 내가 있었다. 나보다 두 학년 높은 동네 오빠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실에서 쓴 수기」에 보면 ‘의식이야말로 인간에게서 가장 위대한 불행’이라고 했는데 인사도 안하면서 의식은 왜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그 사람이 먼저 인사할 리는 만무고, 오기를 버리고 내가 먼저 인사를 하던지, 아니면 진입로를 바꾸던지 양단간에 결정을 해야 한다. 숨 막이는 이웃은 이미 이웃이 아니다. 가슴 깊이 새겨둔 명장면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홀린 듯 다가오는 모습은 누군가를 늘 달고 왔다. 그 관계 맺기의 끝에는 언제나 진정성과 순수성이 숨어 있었다. 좀 깔끔하고 아살하게 늙어가는 방법은 없을까. 이 행복한 놀이터에서 맘껏 책과 씨름하면서 뭔가 끼적거릴 수 있는 원천적인 힘은 없는 듯 있는 남편의 조력임이 분명하다. 혼자 노는 것과 함께 노는 것의 균형이 깨진다면 꿈꾸는 놀이터의 행복도 사라질 것이다. 마치 영화‘다가오는 것들’의 여주인공 같이. 정년퇴직을 했다. 정시에 출근하지도 않고 책임감도 필요 없는,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나는 날아갈 듯 기뻤다. 퇴직한 낯설음을 그날로 바로 날려 보냈다. 그런데 그 일보다 훨씬 더 행복했던 것은 공일을 오롯이 쉴 수 있어서였다. 인간의 속성은 오묘해서 그 누구도 가늠할 수 없다. 오죽하면 열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한 길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던가. 평생을 같이 산 부부도 모른다고 하는 데. 우리 두 사람은 말이 살아가는 문화의 동시대를 겪었고, 또 앞으로도 동시대를 걸어야 하는 동질감에서 그러지 않았을까. 나는 고리타분한 인생을 산 것 같아 늘 내 마음 한 귀퉁이가 허전했었는데 통속적이고 유치한 마음이 잠재되어 있었나 싶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경이로운 대자연에 반하고 유구한 문화나 문명에 심취되어 여행을 떠나지만 끝내는 그때 그 곳에 겹쳐져 있던 사람들까지 못내 그리게 된다. 작은언니는 자연과 문명을 기억하라지만 나는 언제나 사람소리까지 덤으로 얻는다. 어우동 어미가 펄떡 주저앉으며 장탄식을 한다. ‘사람이 누군들 정념이 없겠스라. 허긴 내 딸 우동이가 정념이 좀 과하긴 했지라. 어이구 내 팔자야! 불쌍한 내 딸 우동아!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정념이 약한 년으로 태어나 일부종사하면서 오래오래 살거래이. ’ 거리풍경은 저마다 나라마다 다 다르다. 그러나 거기 서 있는 사람은 여전히 똑같이 아름답다. 인간이 아름다운 것은 다양한 감각과 감성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것도 아주 쉽게 표출할 수 있는 위대성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어쩜 문학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 될지도 모르겠다. 거리풍경은 저마다 나라마다 다 다르다. 그러나 거기 서 있는 사람은 여전히 똑같이 아름답다. 인간이 아름다운 것은 다양한 감각과 감성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것도 아주 쉽게 표출할 수 있는 위대성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어쩜 문학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 될지도 모르겠다. 행복은 크고 거창한 것에 있지 않고 지금 바로 내 앞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 들이다. 박준 시인의 시가 떠 떠오른다.「봄날에는 사람의 눈빛이 제철」이라고 했는데 역시 나의 행복은‘낮은 데로 흐르는 사람의 눈빛’이다. 자기 특유의 분명한 소리를 내고 있는 침 세 개 중에 나는 어떤 유형으로 살아왔을까? 눈을 감았다. 지나간 세월들이 떠올랐다. 긴 바늘 같기도 하고 짧은 것 같기도 한데, 늘 종종거리면서 고달프게 하루하루를 헐떡이며 살아온 것으로 봐서는 긴바늘 쪽인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자기가 만들어 놓은 우물에 빠져 맴돌고 있다. 하긴 몸과 얼굴이 프로가 아닌데, 장자(莊子)가 말한 상복(上福)이 아닌데, BC 4세기경에 살았다는 그의 말은 21세기인 오늘, 살아서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르지. 어쩌겠어. 애써 스스로 달랜다. 온 바닷물을 붉게 적시며 타오르는 장엄한 해를 맞지 못하리라는 것을 누군들 모르리오만은 다만 보이지 않는 해를 가슴에 담고자 하는 염원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눈에 보이는 해가 다는 아닐 것이다. 가슴속에 품은 해는 지는 법이 없다.
총 
바보 빅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