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뜨겁게 뜨겁게 불행한 사람들 강은교 언젠가 뒤돌아봐줄 것 같은 사람 문정희 찻잎 덖을 때의 뜨거움과 깊은 내공 이시영 시인보다 먼저 일어서는 시인, 시 심부름꾼 최승호 어두운 닻, 환한 돛 이성복 시보다 인간이 더 매혹적인 불운이 그에게도 있었다 함민복 세상을 이기는 부드러운 힘
2 삶의 뒤란을 엿듣는 사람들 허만하 전자현미경보다 더 미세한 시인의 눈 이형기 투병, 새롭게 시를 벼린다 고 은 시적 불운이 필요한 나대지 위의 고아 신경림 떠도는 자의 한평생 시쓰기 황동규 몸에 병 많다 술 마심 주저하랴 정진규 느렸지만 시인의 눈길은 따뜻하고 팽팽했다
3돌아올 길을 지우고 떠난 이유는 김춘수 언어로의 낯선 귀환 홍윤숙 평생 채워지지 않고 목이 마른 항아리 김규동 좋은 시는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김종길 산악을 품었으되, 깊은 물이 흐른다 김남조 이 세상에 진정한 연인은 위대한 시인뿐
4 울음에서 웃음으로 뛰어내린 사람들 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최하림 풍경 속에 녹아 있는 시인의 눈 이근배 그의 시 속엔 모국어의 큰 화두가 있다 김종해 어머니는 빈궁을 채우고 아들은 시를 길어올렸다 서정춘 균열이 심한 묵사발 혹은 마디 곧은 대 같은 김지하 화산에서 막 뛰어내려온 시인
1. 시인보다 더 예리한 문학기자의 시인 이야기
스스로를 “말뚝벙거지를 눌러쓴 시 심부름꾼”으로 자처하는 사람, 시인보다 더 시인을 닮은 사람, 시와 시인에 매혹당한 가을을 닮은 남자…… 또는 이런 낯간지러운 표현에 고개를 저으며 “아니올시다!” 똥침 놓을 자세를 준비하고 있을 소탈한 사람. 김광일 기자, 그가 이번에 펴낸 <시보다 매혹적인 시인들>은 시 계간지인 <시인세계>의 ‘zoom-in’ 코너를 통해 지난 7년간 화제 속에 연재된 인터뷰 모음집이다. 시인들과의 내밀하고 황홀한 만남이 담겨진 이 책 속에는 인터뷰 연재 기간 중 작고한 이형기, 김춘수 시인을 비롯하여 고은에서 함민복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23명의 시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간 <시인세계> zoom-in 인터뷰란에 오른 시인은 다음과 같다. 김춘수, 홍윤숙, 김규동, 김종길, 김남조, 이형기, 고은, 허만하, 신경림, 황동규, 정진규, 정현종, 최하림, 이근배, 김종해, 서정춘, 김지하, 강은교, 문정희, 이시영, 최승호, 이성복, 함민복. <시인세계>의 zoom-in 인터뷰는 오랜 기간 연재되면서도 매회 새로운 질문과 문장으로 독자들의 좋은 반응을 받아왔다. 한 사람의 시인과 시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부가 없이는 불가능한 예리한 질문들,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진지한 자세, 우리 시 전반에 관한 광범위한 관심과 애정…… 김광일은 틀에 박힌 ‘시인과의 인터뷰’를 거부하고 언제나 새롭고 진정성 있는 인터뷰가 되고자 노력한다.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시인일지라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를 독자들과 함께 탐험하고자 한다. 틀에 박힌 ‘시인과의 대화’로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멀찍이 떨어진 채, 필자는 ‘일상의 작은 숨결’인 시인들의 살아 있는 이야기들을 포획하여 싱싱하게 펄떡이는 시의 속살을 장만해낸다. 그야말로 ‘자연산’이라 할 그의 글들은 독자의 구미를 가득 당겨 놓는다. “시인들의 삶과 고독을 균형있고 세련된 시력으로 포착해낸 인터뷰”, “현대시에 대한 빼어난 통찰, 시인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이 그려낸 세밀화”라는 문정희 시인의 말처럼, 김광일 기자와 인터뷰를 가진 시인들(그리고 독자들)은 그가 갖고 있는 투명하고 따스한 눈길 위에 함께 따라오는 예리한 질문과 관찰에 놀란다. 이 책의 저자가 “시인들이란, 마블링이 보기에는 엄청 아름답지만 막상 입안에 넣고 씹어보면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는, 외계인 같은 존재들이다. 시인이란 거기 저만치 떨어져 서 있을 때는 무척 사랑스럽지만 막상 다가가서 껴안을 때는 허망하게 증발되어 진공만 남는, 만화경 속의 투명인간 같은 존재들이다.”라고 정곡을 찌르는 순간, 이미 시인들은 비밀스런 아우라를 걷어낸 하나의 피사체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한 겹의 껍질이 벗겨나간 시와 시인의 두근거리는 속살의 울림은 오롯이 독자들이 느끼게 되는 즐거운 떨림으로 전해진다.
2. 시인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으로 그려낸 시인의 초상
김광일 기자에게 시인들은 어떤 존재일까?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시인은 불편한 존재다. 그들은 국경 안에서 결코 박멸되지 않는다. 물론 추방되지도 않는다. 시인은 세상에 대한 사랑이 과도하다. 시인은 잘 운다. 시인은 같이 살고 있는 피붙이에게, 연인에게, 나랑 같이 사는 게 힘들면 너 혼자 도망가, 하고 말하는 존재들이다. 시인은 노동생산성이 낮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시인은 잠수함에 들어간 토끼 같은 존재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시인은 불편한 존재다.”
제1부 뜨겁게 뜨겁게 불행한 사람들 강은교 : 언젠가 뒤돌아봐줄 것 같은 사람 함부로 가 닿을 수 없는 사람. 그러나 언제든지 어느 외진 길거리를 생각하기만 해도 저만치 앞서 걷고 있을 것 같은 사람. 누군가 부르면 외면하지 않고 그때마다 긴 머리를 출렁이며 뒤돌아보아줄 것 같은 사람. 강江은, 교橋. 리버 이즈 브리지. 말장난. 강은 다리라는 뜻이래, 불현듯 농담을 건네고 싶은 사람… 시詩도 그와 같아서 강 위에 얹힌 다리처럼 우리로 하여금 제 모습 비추며 물 위를 걷게 하기도 하고, 강과 더불어 가는 물이 되게도 하는 것이다.
문정희 : 찻잎 덖을 때의 뜨거움과 깊은 내공 문 시인은 호화로운 것은 호화롭게, 흐드러진 것은 흐드러지게, 비참한 것은 비참하게, 물상들이 제 본성을 따라 맘껏 뻗어가라고 뜨거운 응원가를 부르다 목이 쉰 사람 같다. 냉동고에서 막 꺼낸 보성녹차처럼 찻잎 덖을 때의 뜨거움을 아스라한 내공 속에 가둬두고 있는 문정희 시인에게 무엇을 묻고 무엇을 듣는단 말인가. 궁금한 게 없는 기자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실은 아는 게 하나도 없으면서 마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기자가 불행한 것이었다.
이시영 : 시인보다 먼저 일어서는 시인, 시詩 심부름꾼 그는 시인 앞에서는 배고프다고 말하는 법이 없으며, 해가 지고 식탁이 차려지면 시인보다 나중에 앉고 시인보다 먼저 일어선다. 그는 제 호주머니보다 시인의 호주머니를, 제 집 숟가락보다 시인의 식솔들을 가슴에 담고 다닌다. 시詩 심부름꾼이며, 시詩장사꾼이 되는 게 즐겁다. 그는 대체로 시인 곁에 걸어갈 때도 제 걸음소리를 내지 않는다.
최승호 : 어두운 닻, 환한 돛 큰 키를 예의 구부정한 방식으로 눕히듯 방안으로 들어서는 최승호 시인은 소탈, 소탈, 소탈… 그런 느낌이다. 얼굴 광대뼈에서 턱 끝으로 흐르는, 사람 좋은 미소는 여전했고, 까칠하게 다듬은 수염과도 잘 어울렸다. 그에게 죽음이란 경험은 시를 한쪽으로 몰아가기도 하고, 때론 시의 방향을 이리저리 바꿔놓기도 했을 것이지만, 시인의 시가 태어난 유년의 자리, 시인의 시가 야무지게 여물어간 청춘의 그늘, 그것만이라도 꼼꼼하게 살펴볼 수 있다면 나름의 수확이리라.
이성복 : 시보다 인간이 더 매혹적인 불운이 그에게도 있었다 아름다운 말들이 싫어지는 시점에 이성복 시인을 만났다. 인간의 언어는 최소한의 소통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곁길이 문학일 수도 있겠으나 왜 그랬는지 그 무렵 휘어진 길은 싫었다. 그는 투명했다. 같이 진흙밭을 뒹굴었는데 그의 옷은 깨끗했다. 아니 오히려 더 빛났다. 사물을 보듬되 묻히지 않는 시법詩法이다. 그의 시, 그의 산문, 그의 모습에 매료됐던 고비가 몇 차례 있었다. 시인다움에 빈틈이 없는 시인이다.
함민복 : 세상을 이기는 부드러운 힘 함민복 시인을 만나러 가기 전에는 반드시 꿈을 꾼다. 국밥집이었다가 뻘이었다가 종잡을 수 없긴 하지만 꿈에 어김없이 그가 나타난다. 함 시인은 상대편을 무장 해제시키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 사람 좋게 헤살거리는 그의 표정을 사납게 굳어버린 표정으로 바꿔 보겠노라고 심술을 부려 보지만 항상 실패다. 정직하게 뻗어나간 눈썹 끝, 준수하게 내리뻗은 콧날, 그리고 상대편의 눈과 수평선을 그었을 때 눈길을 약 5도 각도 정도로 내려보면서 나직나직 말을 이어가는 그 앞에서 표창을 들고 있을 수가 없다.
제2부 삶의 뒤란을 엿듣는 사람들 허만하 : 전자현미경보다 더 미세한 시인의 눈 1992년에 발병한 불수不隨의 몸은 그에게 느린 걸음을 선사했다. ‘감성이 아니고 사물 뒤에 있는 내면의 구조를 얻어내고 싶다’는, ‘언어로 새로운 현실을 만들고 싶다, 제2의 현실을 만들고 싶다’는 허 시인에게 뮤즈는 그에 합당한 걸음의 속도를 선사했는지도 모른다. 청마의 「깃발」이란 시를 볼 때마다 ‘우선 먼저 깃발과 수평선이 십자가처럼 교차하는 구도가 기하학적으로 보인다’는 허 시인은 아직도 감성에 묶이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시인일지도 모른다.
이형기 : 투병, 새롭게 시를 벼린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이란 말은 한 시대 대한민국 교양인들의 덕목이 돼 있었다. 직장 샐러리맨들은 새해 인사철이면 꼼장어가 놓인 포장마차의 테이블을 소줏잔으로 내려치면서 아직도 ‘똥차’처럼 가로막고 서 있는 불퇴진의 선배들을 씹었다. 흔들리는 백열전구에 담배 연기라도 내뿜으면, ‘(그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후렴구가 그토록 어울릴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이형기 시인을 조금씩 잊어가고 있었다.
고은 : 시적 불운이 필요한 나대지 위의 고아 “시대를 매듭짓는 계기에는 맹목의 논리가 있는 것 같아.” 그날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짐승’에게서 비약이나 초월 같은 것들이 달려 나왔다. 논리적 설명을 요구하는 겁쟁이들의 애타는 시선을 그윽하게 감싸안는 그가 가볍게 걷고 있었다. 끝이 불안한 짐승은 말년에 깃털을 더 호화롭게 가다듬는다지. 네 발로 엎드린 짐승이나 털없는 짐승이나 마찬가지다. 그것들의 영혼에 어설피 깃들인 종교도 결국 전체적으로는 짐승을 닮을 수밖에 더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문학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라는 말을 고은 시인은 하고 싶었을까?
신경림 : 떠도는 자의 한평생 시쓰기 “좋은 시란 독자와 의사소통이 돼야 합니다. 또 일회성보다는 오래 가야 합니다. 어떤 시든 그 시를 읽자마자 머리 속에 그림이 박혀 퇴색하지 않는 시가 좋은 시더군요. 많이 읽힌다는 것이 좋은 시의 기준은 아닙니다. 대중가요의 가사는 널리 읽히는 것이 목적이겠지만, 시는 깊이 읽히는 것이라고 봅니다.”라며 ‘좋은 시’에 대해 설득하고자 하는 신경림 시인의 간곡함이 많은 독자들의 귀에 들리고 있는 듯하다.
황동규 : 몸에 병 많다 술 마심 주저하랴 그의 몸은 유쾌했다. 그가 가장 흠모하는 시인인 두보가 시 「곡강曲江」에서 “꽃이야 피었다 금세 또 지는 것且看欲盡花經眼 / 몸에 병 많다 술 마심 주저하랴莫厭傷多酒入脣”라고 읊었듯이 그는 채워지는 잔마다 주저없이 비웠다. 필자는 황 시인을 대학 때 처음 만났다. 필자는 학교 신문사의 학생기자였고 황 시인은 자문교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가 내뿜는 인상은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년’이었다. 호기심과 기쁨을 가득 담은 눈길은 ‘비록 몸은 늙어가도 여전히 철이 안 들고 싶은’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정진규 : 느렸지만 시인의 눈길은 따뜻하고 팽팽했다 ‘몸’을 이야기하고, ‘알’을 이야기하는, 영원과 시간 사이의 통로를 무면허로 개설해버린 정진규 시인을 만나러 가면서, 이번에야말로 다짜고짜로 만나고 싶었다. 허허허 웃으며 사람 좋은 선배 시인으로 후배들에게 존경과 인기를 모으고 있는 정진규 시인을 만나면 그의 몸을 벗기고 싶었다. 존재에서 초월로 이행하는 필연적 연찬은 좋다 이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당신은 살아 있는 몸 안을 헤집고 주검의 모습을 미리 보아버렸을까 궁금했습니다, 가 준비한 첫 질문이었다.
제3부 돌아올 길을 지우고 떠난 이유는… 김춘수 : 언어로의 낯선 귀환 ‘시는 언제나 언어로부터 해방되려는 충동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시가 자유를 얻으면 중력을 잃는다. 발바닥이 공중에 떠서 허둥댄다. 육체를 가진 인간의 비극적 유한함이다. 관념의 자유를 위해, 존귀하기 이를 데 없는 순수 무의미를 위해, 그렇게 존재론적 알레고리마저 다 뭉개버렸던 허무주의 시인은 그 시절 내내 가면 무도회를 열고 있었다. 시신詩神을 닮고자 춤을 추면서 누구는 이미지 파괴를 읽고 가고, 누구는 바다 냄새를 맡고 갔다. 세월은 흘러흘러 무도회도 어느덧 새벽이 됐다.
홍윤숙 : 평생 채워지지 않고 목이 마른 항아리 단아하고 꼿꼿한 모습으로 기억에 남아 있는 시인을 만나러 가는 길은 조금 긴장되었다. 올해(2005년)로 팔순을 넘어서는 홍 시인에게는, 조금 시詩스럽게 말한다면, 항아리도 비어 있고, 의자도 비어 있고, 집도 비어 있었다. 육신의 기운이 팔팔할 때 동료와 후배들의 일에 마음을 쓰던 그녀에게 이제는 모든 것이 평화롭게 비어 있었다.
김규동 : 좋은 시는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김규동 시인은 아파트 문을 반쯤 열어 놓고 기다렸다. 주름살이 먼저 웃는다. 작은 얼굴, 갸름한 턱선, 그리고 작은 몸집에 작은 키다. 세상의 모든 것에게 그들의 공간을 넉넉히 남겨 놓기 위해 자신은 최대한 작게 차지하고 있다. 어떤 시인에게는 시 한 편이 염통의 핏줄 하나를 말라붙게 했을 것이고, 어떤 시인에게는 시 한 편이 허파꽈리 한 떨기를 졸아붙게 했을 것이며, 어떤 시인에게는 시 한 편이 얼굴에 깊은 고랑 하나 만들었을 것이다. 시인은 영혼의 고독을 위해 주저없이 몸을 파는 족속이다.
김종길 : 산악을 품었으되, 깊은 물이 흐른다 어떤 강고한 늙음을 마주하고 앉아 있을 때면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내 몸의 젖비린내가 갑자기 끼쳐오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코를 큼큼거리고 있었는데 그날 저녁이 그러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한국 문단에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던 큰 분을, 그 분 평생 이력履歷의 겨우 삼분의 일쯤 되는 이력을 갖게 된 내가 마주 앉았을 때, 솔직히 고백하면 어떤 캄캄함 같은 것, 혹은 어떤 환함 같은 것이 번차례로 눈앞을 어지럽혔다.
김남조 : 이 세상에 진정한 연인은 위대한 시인뿐 선생은 요즘 “사는 게 참 좋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했다. 우리는 솔직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반세기를 문학과 더불어 살아온 노시인이 “이제야 사는 게 좋아졌다”라고, 굳이 낮은 목소리로, 그리고 평화롭게 읊조리듯 말씀하시는 단아한 모습을, 이제 마흔을 갓 넘긴 우리가 송두리째 이해한다면 그것이 거짓일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어렵고도 편했다.
제4부 울음에서 웃음으로 뛰어내린 사람들 정현종 :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몇 년 전이나 몇 달 전이나 그의 머리칼은 여전히 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많은 후배 시인들은 말한다. “나도 정현종처럼 늙을 것이다.” 그건 일종의 경배다. 문학적이고도 인간적인 시샘을 선배에게 올릴 때 선배는 크흠 크흠 기침을 한다. 시인은 은퇴가 없지만 직장인은 은퇴가 있다. 그래서 정 시인은 “시간이 많다.”고 말했다. 하긴 그 동안에도 정 시인이 시간에 쫓기듯 다급하게 서두르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 그 사이에 정 시인은 몇 번인가 “허, 허, 허…” 하고 또 웃었다. 저 텅 비어 있음에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최하림 : 풍경 속에 녹아 있는 시인의 눈 오후는 문학적이다. 햇살이 적당하게 힘을 잃어가는 시간이다. 역사상 어떤 악당도 이런 오후에는 선전포고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나치게 에너지가 많은 역동적인 것들조차 평화롭게 비껴 있을 것만 같은 그 시각쯤 최하림 시인을 찾아갔다. 최하림 시인이 서 있는 마당에 자동차가 들어서니 그가 천천히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지나고 보면 이 세상은 그 무엇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제 깨달은 게 틀림없다. 그는 매우 천천히 걸었다.
이근배 : 그의 시 속엔 모국어의 큰 화두가 있다 이근배 시인은 천상 부산했다. 열정과 부지런함과 재능이 아직도 펄떡펄떡 살아 있다는 느낌이었다. 낼 모레면 칠십객인데 저런 힘이 어디서 샘솟는지 놀라웠다. 흔히 시집이 꽂혀 있어야 할 것 같은 벽면 책장에는 온통 벼루가 놓여 있었다. 인사 직후부터 말은 주로 이근배 시인이 하고 있었다. 몸풀기용 잽을 주고받을 틈도 없이 상대는 이쪽 턱밑에 펀치를 날리며 밀어붙였다.
김종해 : 어머니는 빈궁을 채우고 아들은 시를 길어올렸다 김 시인은 천마산 아래 초장동 산비탈에서 컸다. 어머니는 충무동 시장 어귀에 좌판을 펴놓고 장사를 하면서 시인의 남매들을 키웠고, 김 시인은 물지게를 지고 어머니를 도왔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1년간 여객선을 탔다. 그는 ‘항해일지의 시인’이었다. 격랑의 뭍, 세상을 헤쳐가는 그 시들이 부산 바다가 아니었으면 어찌 탄생했을 것인가. 등단 40여 년이 흐르면서 쌓인 김 시인의 시적詩的 내공은 간단한 몇 마디로 상대의 오장육부를 뒤흔들어 놓았다.
서정춘 : 균열이 심한 묵사발 혹은 마디 곧은 대 같은 안경 너머로 무한정 따뜻하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얼핏 하회탈을 닮았다. 그는 대뜸 술부터 따랐다. 서정춘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일품이었다. 남도의 피가 흐르지 않으면 도저히 탁음과 청음을 갈마들며 일으키는 청승을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요리를 잘 하지 못한다면,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면, 결코 좋은 시를 쓸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지하 : 화산에서 막 뛰어내려온, 그러나 항상 촉촉한 습기를 지닌 시인 시인 김지하를 만날 때는 바짝 긴장된다. 그가 마주 앉은 젊은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인 부채의식’을 자극하던 세월도 이미 오래 전에 지나버렸건만 왜 지금도 긴장을 유발할까. 왜 그럴까. 그에게는 언제나 불타는 화산에서 막 뛰어내려온 표범 같은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기 때문일까. 걸음은 느리지만 무겁지 않고, 술은 입에도 대지 않지만 목소리는 항상 촉촉한 습기를 머금었다.
3. ‘나는 말뚝벙거지를 눌러쓴 시 심부름꾼’
‘나는 말뚝벙거지를 눌러쓴 시 심부름꾼’이라고 소탈하게 말하는 인터뷰어 김광일은 말한다. “사실은 그렇다. 시인이란 리듬으로 한 세상을 크게 속이는 자들이다. 혼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어림없는 수작이다. 혼은 ‘언어 이전’이거나 ‘언어 이후’의 강박일 뿐이다. 한때 침도 뱉을 줄 알았다는 시는 그저 스킬이다. 늦은 밤 황톳방에서 막걸리에 목을 축이고 음담패설 섞어가며 단지 몸에 붙은 손놀림으로 새끼를 꼬았던 그 시절의 마당 머슴처럼 차라리 시인도 손끝의 익숙함으로 시를 쓴다. 시인은 끝까지 부끄럽다. 좋은 시 한 편 남길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다가 그만 북망산이다. 새끼가 똑바로 꼬아지지 않을 때는 손끝보다 먼저 부끄럽다. 시를 만드는 사람도 그렇고, 시를 심부름하는 사람도 부끄럽다. 속인 것도 부끄럽고, 들킨 것은 더 부끄럽다. 시 독자들은 대체로 너그러워서 끝까지 속아주고 죽는다. 부끄러울 때 고개를 숙이기보다 고개를 빳빳하게 쳐듦으로써 부끄러움을 감출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이 땅에는 점점 많아지고 있다. 시 장사는 그래서 가능하다. 이쪽 동네에서는 당최 문학적인 죄와 벌이란 것이 없다. 그렇게 또 한 번 자신을 속인다. 나는 말뚝벙거지를 눌러쓴 시 심부름꾼일 뿐이다.”
총 
바보 빅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