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저마다 기질을 갖고 태어난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기운이 넘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도 있고, 호기심 많아 늘 두리번거리는 아이도 있고 혼자 노는 것을 즐기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주위 사람들을 늘 필요로 하는 아이도 있다. 어린 나이에도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듯이 보이며 쾌활하고 상냥하게 걸음마를 하는 아이는 만사를 몸으로 때우는 아이와는 아주 다르다. 이런 아이의 기질은 부모, 또래 집단, 학교, 기타 제도에 의해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거부되기도 한다. 특히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이는 점차로 사회가 요구하는 표준 여성상, 또는 남성상에 자신을 꿰어 맞추려고 애쓰게 되면서 본래의 자기의 일부분들을 잘라내 버리게 된다. 정신과 의사이자 융 심리학자인 진 시노다 볼린은 <우리 속에 있는 남신들>에서 수십 년의 임상 경험을 토대로 융의 유형론과 여성주의를 결합하여 여성과 남성을 보는 새로운 심리학적 관점을 제시한다. 오늘날 우리의 지각과 행위에 영향을 끼치고 우리를 형성하는 심리학적 유산인 그리스 신화에서 가부장제 성립 과정의 단서들을 찾아낸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래 우리 사회에서 남성들을 둘러싼 논의는 이제야 지난 세기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하는 듯싶다. ‘고개 숙인 아버지’에 대한 동정론, ‘남자다움의 신화’ 회복이 심심하면 고개를 쳐들고 있는 가운데서도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아들들이 늘고 있고 ‘권력자’의 내면을 고백하고 반성하는 남성들의 자기 성찰기가 나오고 있다. <우리 속에 있는 남신들>은 ‘21세기는 여성의 시대’이고 호주제도 사라진 판에 ‘가부장제’가 웬 말이며, 그동안 가해자로 몰린 남자들의 처지가 얼마나 불쌍하고 쓸쓸한지 아느냐, 지금은 남자들을 감싸 안을 때라고 강변하는 이들에게 몸에 깊이 새겨진 ‘권력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망연자실해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헤매는 이들에게 변화된 시대를 풍요롭게 살아갈 지혜를 제공해 준다. 남신들을 아는 것은 곧 가부장제를 아는 것이다. 가부장제는 우리의 문화적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로 기능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 체계. 가부장제에서는 남성들이 본래 갖고 있던 여성적인 요소(융의 아니마)는 열등한 것으로 취급받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출세하려면 눈물이나 감정, 남을 배려하는 세심함 등은 거세되어야 마땅한 기질인 것이다. 남성들은 내부 세계의 원형과 외부 세계의 고정관념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살아간다. 막연하게나마 “이게 아닌데…” 하면서 살다가 자기 속에 있는 원형과 눈에 보이는 역할의 불일치를 깨달으면서 자신의 삶을 용기 있게 살아가는 선택을 내릴 때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에서 잘려져 나간 자신의 일부분을 회복하게 되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덟 남신들을 의인화하여 유형화함으로써 오늘을 살고 있는 남성들 내부의 복잡성과 남성들 간의 다양성을 드러내 주고 있다. 인성, 일, 대인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남신들 유형이 등장하는데, 제우스, 포세이돈, 하데스로 일컬어지는 올림포스 1세대인 아버지 신들과 아폴론, 헤르메스, 아레스, 헤파이스토스, 디오니소스로 이어지는 아들 세대의 신들은 현대 남성들(과 여성들)의 모습을 좀 더 잘 파악하게 해 준다. 저자 볼린은 남신이 지닌 특별한 면모 또는 양상을 기술하는 데 역사적 인물들과 유명 인사들,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들을 동원하여 재미와 생생함을 더해 준다. 저자의 상상력을 통해 우리가 잘 아는 스티븐 스필버그나 조지 루카스의 영화,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 등은 곧 오늘날의 신화로 재창조되며, 오이디푸스 신화와 구약성서의 아브라함-이사악 이야기도 재구성된다. 그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원형들이 지닌 위세, 의미, 한계들을 반영하고 있다. 여신과 남신은 여성성과 남성성이라고 추상화되어 말해지는 것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특징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런 특성들을 갖는 개인들이 현대 가부장제 사회 구조 속에서 만들어 내는 사회적 심리적 관계들의 경험을 일반화해 놓은 것이다.(읽는 이들은 이 책을 도식적으로 이해하여 여성들 또는 남성들 내부의 복잡성과 여성들 또는 남성들 간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 상대를 하나의 원형으로 규정짓고 고정화함으로써 또 다른 고정관념 속에 가두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기를….) 우리 속에 있는 남신들 제우스는 하늘의 남신으로 의지와 정신세계를 다스리며 가부장제 사회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한다. 비정하며 권력과 부를 쌓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며 일단 지위를 갖게 되면 더 높이 올라가고 싶어 하는 남성들에게서 제우스 원형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 남성들 중에는 결혼 생활과 성생활이 제우스의 바람둥이 기질을 닮고 있을 수도 있다. 하늘은 모든 다른 자질들 위에 존재하는 의식적인 태도, 통제력·이성·의지 등을 상징한다. 벼락과 독수리는 제우스를 나타내는 주요 상징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재빠르게 결단을 내리는 그의 특징을 적절히 표현하는 것이다.
포세이돈은 바다의 신으로 감정과 본능의 세계를 지배하며 홍수를 가져오는 자, 대지를 흔드는 자로도 불렸다. 그가 의인화하는 감정, 그가 다스리는 심리적 영역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파괴력으로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는 파도가 넘실대는 사나운 바다를 생각하면 된다.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격렬한 감정에 예기치 않게 휩싸여 전율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포세이돈을 직접 체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를 상징하는 말은 신체적 본능이 지닌 힘과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그는 또한 아주 깊이가 있고 아름다운 심리의 세계로 알려질 수 있는 원형이기도 하다. 감정적 깊이에 가까이 간다는 것은 아직 제대로 평가되지 않은 인간의 심리 세계의 일면이며 가부장제 문화에서 낮게 평가되고 억압되어 온 부분이다.
하데스는 저승의 신으로 영혼과 무의식의 세계를 다스린다. 그는 오직 꿈을 통해서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며 뚜렷하지 않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보이지 않는 원형의 세계를 의인화한다. 하데스가 사는 곳을 사람들은 사탄이 지배하는 악마들의 소굴, 산 사람들에게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피해야 하는 곳으로 여긴다. 그런데 저승은 풍요로움의 원천일 수도 있다. 집단 무의식과 같은 것으로 그곳에 사는 망령들은 생명력, 곧 출생을 기다리는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잠재력을 필요로 하는 원형, 형태 같은 것이다.
아폴론은 태양의 신으로 멀리서 지켜보고 행동하는 남성적인 태도를 구현한다. 그는 제우스가 가장 아끼는 아들이었으며 그의 속성을 지녀야 가부장제 사회에서 출세할 수 있다. 아폴론은 황금 화살로 먼 거리에 있는 과녁을 맞출 줄 아는 궁수이자 하모니를 만들어 내는 음악가였다. 그는 분명한 정의를 원하는 인물의 모습을 의인화하고 있으며 기술에 정통하고 질서와 조화를 존중하며, 외양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보다는 겉모습을 보기를 좋아한다. 그는 느낌보다는 생각을, 친밀하게 지내기보다는 거리감을 두기를, 주관적인 직관보다는 객관적인 평가를 좋아한다. 우리 문화에서 아폴론의 기질은 학교 교육 등을 통해 강화되기도 한다. 헤르메스는 전령의 신이자 영혼의 안내자, 마술사, 길과 경계의 신이었다. 이러한 원형을 구현하는 남성은 안정되게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어렵다. 변덕쟁이 또는 수은처럼 이러한 남성은 그를 붙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잡히지 않는다. 뛰어난 말솜씨, 발명의 재주, 원만한 대인 관계, 민첩한 사고력과 행동력은 일을 완수하거나 남을 속이는 데 창조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특질들이다. 그는 의미의 전달자이자 어린아이의 구조자로서 긍정적인 원형이기도 하다. 헤르메스 원형은 우리가 새롭게 만나는 사람과 사물 사이를 스스럼없게 해준다. 발견의 계기들을 열어 주고 동시적인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게 해준다.
아레스는 무사, 춤꾼, 연인, 전쟁의 신으로 남성적인 체력, 격정, 즉각적 행동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의 마음과 본능은 그로 하여금 결과에 아랑곳없이 몸으로 행동하고 반응하게 했다. 가부장제가 그의 속성들을 낮게 평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 제우스는 그를 미워하고 따돌렸다. 이 원형은 자기감정과 몸에 충실할 소지를 심어 준다. 구애를 할 때 이 점은 아주 긍정적일 수 있다. 그러나 화가 날 때 그는 본능적으로 반응을 하며 가끔은 그에게 이롭지 못하고 남들에게 해가 되는 상황에 빠지기도 한다.
헤파이스토스는 대장간의 남신이자 지체 장애인이었으며 올림포스 신들 가운데 유일하게 일을 한 신이다. 그는 기능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물건들을 창조하려는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충동을 의인화한다. 올림포스 산에서 박대당하고 버림받은 헤파이스토스는 권력과 외모를 중시하는 제우스가 다스리는 고상한 세계에서는 그 진가를 인정받지 못해 이 남신을 닮은 남성들은 출세하는 데 어려움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원형이 출현하면 미적 감각과 풍부한 표현력이 자유롭게 펼쳐져 형태를 부여하게 된다. 이 원형을 지닌 사람은 일에 몰두하여 자기 분야에서 일인자가 되기 위해 혼자 있는 시간을 작업장·스튜디오·실험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이자 황홀경과 공포의 신, 야성의 신이자 가장 축복받은 구출의 신이었다. 그는 올림포스의 막내 신이면서 유일하게 인간을 어머니로 둔 남신이었다. 디오니소스 원형은 긍정적인 잠재력과 부정적인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다. 감정이 지닌 가장 고상한 부분과 가장 천박한 부분을 건드리며 마음속의 갈등과 사회와의 갈등을 일으킨다. 신비주의자 남성들과 살인자 남성들에게 나타나는 원형이다. 황홀경의 순간들과 굉장히 모순적인 충동을 경험하는 사람들 속에 있는 원형이다. 디오니소스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청하는 것은 일상적 환경, 일상적인 옷차림, 습관적인 역할들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이 외에 올림포스 신들 가운데 행방불명된 남신이 하나 있다. 그는 사랑으로써 세상을 다스리고 가부장제를 극복할 남신이었다. 지혜의 신 메티스와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날 예정이었으나 태어날 아들이 자기를 무너뜨리고 자리를 차지할 것을 두려워한 제우스가 메티스를 삼켜 버리고 말아 여성의 지혜도 또 사랑으로 다스릴 남신도 행방불명되었다. 남신들이 통치권을 장악한 그리스 신화에는 여러 신들이 등장하지만 그 누구도 강건하고 현명한 어머니와 강하면서도 사랑에 넘치는 아버지를 가져 보지 못했으며 그 점에 있어서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제 남성들과 여성들이 위대한 어머니, 메티스의 지혜와 연결되어 권력이 아니라 사랑에 근거한 선택을 내릴 때 우리 속에 있는 행방불명된 남신을 찾게 된다. 깨달음의 순간 우리는 이러한 남신들과 여신들 원형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는데, 이 책의 가장 값진 가치는 뭐니뭐니해도 깨달음의 순간에 있다. 물론 읽는 이에 따라 깨달음의 순간과 내용도 다를 것이다. 남신들의 모습에서 내 자신에게는 없지만 계발해야 하는 특성들,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없었던 특성들을 보게 될 것이다. ‘남신’들에 대한 통찰력은 소년들을 둔 부모들에게 자기 아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평가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그리하여 좀 더 훌륭한 부모가 되게 한다. 그녀(또는 그)는 자기 아들이 어떤 녀석인지, 세상이 그를 어떻게 대우하는 것 같은지, 그의 강점과 약점이 무엇인지, 그가 어디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남성들과 여성들은 또한 자기 아버지들을 분명하게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만큼이나 그들을 용서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남신들과 남신들의 신화를 이해하게 되면 아버지의 객관적인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우리 속에 있는 남신들> 한국어 개정판은 1994년 처음 출간된 책을 작은 글꼴을 좀 키우고 문장을 다듬고 부적절한 장애 관련 표현도 바로 잡은 것이다. 한국어 초판이 출간된 이래 12년의 세월이 흘렀고, 우리 사회의 여성과 남성이 살아가는 맥락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간 행방불명된 자신을 찾으려는 남성들, 몸에 잔뜩 들어가 있는 ‘힘’을 털어내고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능력을 키우려는 남성들, 그리고 남자 친구, 아버지, 아들을 이해하고 자기 내부의 남성성을 만나보고 싶은 여성들은 이 책에서 많은 도움을 얻을 것이다. 이 책과 쌍을 이루는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 <우리 속에 있는 지혜의 여신들>에서는 우리 속에 있는 풍요로운 여성성을 만나볼 수 있다.
총 
바보 빅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