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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존재의 허기를 달래주는 상상지리지想像地理誌
시인에게 시가 된 장소란 항상 장소 이상이다. 이 장소들은 현실로서는 범박하고, 상상으로서는 비범해진다. 김소월의 ‘왕십리’, 백석의 ‘통영’, 서정주의 ‘질마재’, 오장환의 ‘서울’, 고은의 ‘문의’, 김사인의 ‘전주’와 같이 시가 된 장소들이 그런 사정을 잘 증거한다. 이육사의 시 [광야]나 정지용의 [향수]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특정하지는 않지만, 장소성이 도드라진다. 이 장소들은 한결같이 시인의 상상력과 만나 불멸성을 얻는다. 시인들의 시 속에서 현재와 과거의 시간들은 신비롭게 결합하여 신기루처럼 존재를 황홀케 하는 공간으로 문득 펼쳐지기도 한다. 마법의 연금술처럼 근원의 길을 따라 시인이 새롭게 만들어낸 ‘그곳’은 현실 속 결핍된 존재의 허기를 달래주는 상상지리지想像地理誌의 한 페이지가 된다. 이번 [시인세계] 여름호의 기획특집은 [시가 된 ‘그곳’]으로, 문인수, 황학주, 나희덕, 장철문, 곽효환, 유홍준, 이영광 등 활발하게 시작활동을 하고 있는 12명의 중견시인들이 자신에게 특별히 다가와 시가 된 ‘그곳’을 펼쳐 보인다. 장소가 어떤 맥락에서 시인의 상상력과 만나 특화되어 시가 되는 것인지, 시가 된 ‘그곳’으로 조심스레 들어가 보자.
특별한 의미의 장소로 정체성을 부여받은 시가 된 장소
좋은 시편들은 항상 장소와 깊이 연관된다. 이육사의 [광야]나 정지용의 [향수]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특정하지는 않지만, 장소성이 도드라진다. 이육사의 [광야]는 "까마득한 날", 태고의 시간 속에 놓인 신화적인 장소다. 광야는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고고하고 아득한 곳의 표상이다. 광야는 시인의 상상지리학 속에서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한 곳이다. 정지용의 [향수]만큼 고향의 물질적 실감을 절절하게 되살려 노래하는 시도 드물다. 이 고향은 실개천이 "회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며, 늙은 아버지는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이다. 어린 누이와 아내가 추수가 끝난 빈들에서 이삭 줍던 곳이고, 가난한 가족들이 흐린 불빛 아래 둘러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이다.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수 없는 장소가 되어버리고 만 까닭은 고향이 지상에서 사라져 오로지 마음의 지도에서만 찾아볼 수 있게 된 까닭이다. 김소월의 [왕십리]는 시의 장소학에서 의미심장한 위치에 있다. 시인은 주야장천 내리는 빗속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제 신세의 처량함을 반추하고 있다. 이 시의 비밀은 [왕십리往十里]라는 지명 속에서 찾아야 한다. 왕십리는 실제 지명이기보다는 시인의 상상지리학 속의 지명으로 보는 게 타당해 보인다. 왕십리의 "십리"는 목적지를 문턱에 두고 "가도가도" 좁혀지지 않는 절망의 거리인 셈이다. 고은의 ‘문의文義’는 네 번째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의 표제시에 등장하는 장소다. 시인 신동문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고은은 충북 청원군 문의 마을에서 있었던 장례식을 다녀온다. 시인은 문의 마을에서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목격하고,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소망한다. 시인은 그 스산한 겨울 풍경 속에서 죽음의 적막함을 느끼고 문의 마을이 죽음에 대한 선험先驗의 자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다른 어느 곳이 아니라 문의 마을을 특정해서 그곳이 죽음과 그것에 잇대인 상념들을 불러일으킨 곳이라고 지목함으로써, 우리 시의 지리학에서 ‘문의 마을’은 아주 특별한 의미의 장소로 그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장소 이상의 의미가 된 시적 공간
우리가 한번은 가봄직 했던 언덕과 들판, 산과 바다, 그리고 어느 마을 등, 그 장소의 지형과 지리 위에 사유와 영혼의 빛깔이 입혀질 때 그곳은 몽상과 좌초된 꿈이 나뒹구는 시의 심연으로 변한다. 곽효환의 ‘통영’, 문인수의 ‘정선’, 안현미의 ‘춘천’, 황학주의 ‘아프리카’는 이같은 꿈과 현실이 혼재된 장소를 보여준다. 곽효환의 ‘통영’은 1930년대 애인을 찾아 통영을 찾았던 낭만청년 백석의 ‘통영’과 겹쳐진다. 두어 해 전 초여름, 시인은 비에 젖은 통영에서 "수루 앞 계단에 앉아/ 한 여인이 그리워/ 낡은 항구를 세 번 다녀간/ 자작나무를 닮은 사내를 떠올"린다. 문인수의 ‘정선’은 "뒤돌아보면 검게 닫히는 산, 첩, 첩,// 비가 올라나 눈이 오겠다."라는 구절 속의 비가 오고 눈이 와서 늘 젖어 있는 먼 곳이고, 과거의 자아, 그 자아 속에 기록된 ‘죄’와 ‘가책’을 만나는 장소다. 문인수 시인에게 "정선 가는 길이야말로 내 마음 속으로 가는 길"인 것이다. 안현미의 ‘춘천’은 스무 살의 풋풋함, 스무 살의 사랑이라는 하중荷重을 고스란히 받아낸다. "당신의 눈썹처럼 가지런하게 싸리비질 하고 꼭 한 달만 살아보고 싶었던가/ 햇빛 좋은 날 햅쌀로 풀을 쑤어 문풍지도 바르고 싶었던가"라며 장소에의 기억이 필경 시간에의 기억임을 무심히 드러낸다. 황학주에게 ‘아프리카’는 무엇보다도 ‘사막’이고, 그 ‘사막’은 "인간, 새, 회오리바람, 나무, 모래태풍, 죽음"에 의해 모호함을 지우고 구체적 현실감을 부여받는 장소다. 시인은 ‘아프리카’라는 장소의 타자성에서 "감각적인 전율"을 만나고, 그 속에서 다름 아닌 자신의 자아를 발견한다. 그렇기에 시인은 혼자 아프리카를 찾아가듯, 지금도 낯선 시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장욱의 시는 익명적인 장소의 ‘옥상’을 노래한다. ‘옥상’은 "지상의 결핍이자 지상의 과잉"으로 그 물질성을 무찌르고 음악이 되는 장소다. 이장욱 시인에게 시의 장소는 기억과 필연과 의지와 사물들의 원리가 작동하는 공간이며, 자신의 몸을 무수한 힘들의 긴장 속으로 밀어 넣는 공간이 된다. 김이듬과 장철문과 류근도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익명의 장소들을 시적 공간으로 연출해 낸다.
상상의 장소로 새롭게 변화한 시 속의 장소
때때로 장소는 실존에 빛과 향기를 덧입혀 그것을 영원히 잊을 수 없게 만든다. 나희덕에게 ‘와온’은 "종일 달구어진 검은 뻘흙이/ 해를 깊이 안아 허방처럼 빛나는 순간"을 갖는 곳이고, "찬란한 해도 하루에 한번은/ 짠물과 뻘흙에 몸을 담"그는 곳이다. 해와 짠물과 뻘흙은 하나로 엉켜 몸을 안고 담고 적시고 뒹굴며 시인의 감각에 비벼진다. ‘와온’은 이 뜻밖의 관능적 정념의 방출로 에로스의 자리로 새롭게 조명되는 것이다. 유홍준의 ‘북천’은 애를 밴 젊은 여자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빠져 죽은 저수지가 있고, 정신병을 앓는 남자가 그 저수지에서 익사체를 건져내는 곳이고, 거세당하는 어린 수송아지의 슬픈 울음소리가 메아리치는 축사가 있는 곳이다. ‘북천’은 후지고, 낡고, 새로울 것도 없는 현실이지만, ‘북천’ 언저리에 움집을 짓고 사는 시인에게 이런 이야기들이 덧입혀지며 유일무이한 새로운 장소로 거듭난다. 신동옥의 ‘남양’은 벌교역 터미널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바닷가 마을, "전라남도 고흥군 남양면 망주리 1230번지"이면서, 현실에서는 사라져 없고 오직 마음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시인은 고향 상실자이고, ‘남양’은 "없는" 곳이다. 그곳은 지리학에는 찾을 수 없고, 시간의 지리학에서는 가장 먼 곳이다. 그리하여 ‘남양’은 아련한 슬픔과 이국적 몽환이 엉긴 상상지리학의 장소가 되어버린 곳이다. 이영광에게 장소는 감각의 착란 속에서 돌연 시와 음악으로 바뀌는 장소이다. 이영광의 장소는 ‘지귀地歸’라는 곳이다.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고, 다만 꿩이 날고 토끼가 제멋대로 자라는 무인도이다. 이 삭막한 사실성은 "바다 너머에 희대의 발광이 있다/ 애비 에미를, 형제 친척 동무를 다 여읜 고독이,/ 신이 되려 했던/ 병病이 있다"는 구절의 고독과 병에 극단으로 대조되면서, 고갈로 얼룩진 청춘의 몽롱한 황폐함을 외시外示한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시인들의 시 속에서 장소는 현재와 과거의 시간들이 수없이 겹쳐진 자취이고, 그것은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중요한 한 요소가 된다. 또한 실존의 사건과 행위들은 특정한 장소와 만나 윤색되면서 그 의미가 더해지거나 빛을 발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하이데거 역시 장소를 "인간 실존이 외부와 맺는 유대를 드러내는 동시에 인간의 자유와 실재성의 깊이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위치"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렇기에 "모든 ‘공간’이 ‘장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같은 장소라 하더라도 그곳이 항상 의미 있는 ‘시적 장소’가 되지는 않는다. 내 마음의 허기와 그 장소가 발산하는 빛과 어둠이 절묘하게 만났을 때, 비로소 ‘장소성’이라 부를 만한 것이 생겨난다."는 나희덕 시인의 말에 공감하는 것이며, "장소란 애초에 내가 경험한 곳이든 마음에 지은 터이든 지금 이 순간의 마음자리가 아닌가 싶다."라는 장철문 시인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총 
바보 빅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