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육 년 만에 귀국해 보니 내 운명을 바꾼 엉성한 사건 자유로운 정신과 풍류를 찾아서 기가 죽으면 뜻대로 살 수 없다 알고 보니 네가 독립군이구나 선(善)은 초조하지 않다 외눈박이의 두 눈 뜨기 답답하고 숨 막히고 부끄럽던 청춘 사일구, 오일육, 그리고 파리 유학 가난했던 파리 생활 파리에서 만난 사람들 빈약한 주머니가 고달프긴 하지만 프랑스 시민이 되어 몽양을 생각하며 청산은 애초에 시비가 없는 것 소명절차는 저들이 거쳐야 한다 발문/ 슬프고 따슷하고 맑고 고운…… 신경림
“이 자전적 기록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나라란 무엇이고 민족이란 무엇인가. 또 사람이 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독재정권들이 차례로 무너지고 바야흐로 민주주의 세상이 되었다고 하나, 생사람을 하루아침에 빨갱이로 몰아 잡아가두는 이 나라가 과연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하며 사람답게 살기에 충분한 세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미국에서, 프랑스에서, 일본에서 떠도는 제삼의 혹은 제사의 이유진은 없는가. 가령 이유진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다면 이제 우리도 공범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신경림 시인이 발문에 쓴 이 구절대로 이 책 《빠리망명객 이유진의 삶과 꿈》은 민주주의 세상이 됐다고 하는 오늘의 한국사회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에 이어 참여정부에 이르는 동안 과거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게 보상을 하고, 의문사 진상규명을 하고, 과거사 청산을 하고,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를 놓고 옥신각신해왔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해외 민주화운동 참여자들에 대한 역대 정보기관의 탄압과 조작에 대해서도 진실을 밝히고, 정권 담당세력의 교체에 정치적으로 자족하거나 저항하는 수준을 넘어 진정으로 모든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는 법과 제도, 관행을 수립하는 데 힘을 모으고, 스스로 자긍심을 가질 만큼 우리의 민주주의를 성숙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이 책의 저자는 특히 참여정부에서도 노인이 다 된 해외의 민주인사들에게 ‘입국불허’ 조처를 취하는 태도에 대해 안타까운 심경을 이렇게 토로한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정의(正義)의 전통과 도량과 기백은 다 어디로 갔는가? (…) 왜 아직도 정부는 시비곡직을 만두소 같이 얼버무리고 있는가. (…) 나의 말이 졸렬하고 깔깔하겠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새로운 결단과 참여정부의 긍정적인 해결책에 희망을 건다.”(28쪽) 그러나 저자는 민주투사형이라기보다는 다정다감하고 인간미 넘치는 ‘자유인’이자 ‘휴머니스트’라는 게 그를 아는 지인들의 일치된 평가다. 이 책에서 우리는 저자의 이런 면모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궁지에 몰린 후배의 망명을 도와주려다가 조국에 의해 어처구니없이 간첩으로 몰리고, 파리에서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모진 생활고를 겪고, 가장 어려울 때 부친과 정신적 지주였던 대부를 잃고, 늦둥이 아들은 염색체 이상으로 선천적인 장애아로 태어나는 등 기구하다면 기구하달 수도 있는 삶을 살아오면서도 저자는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이런 그의 태도는 한국인의 특징 중 하나이자 그 자신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정(情)’을 정의하는 대목에도 잘 반영돼 있다. “동양에서는 대체 어떤 사람을 가리켜 정을 아는 사람이라고 했을까? 최고의 아편은 밥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그리하여 때로 인심은 위태롭고 진리는 미묘하고 인정은 스스로 시달림을 탄식하는 사람이다. 또한, 무지와 무심이야말로 고단한 두뇌를 쉬게 하는 건강한 베개임을 아는 사람, (…) 친구들과 허튼 소리를 하지만 여자에게는 정직한 사람, (…) 충고보다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 (…) 죽을 때까지 감격하는 능력을 잃지 않는 사람, 가난한 사람에게 겸허하게 돈을 쓸 줄 아는 사람, (…) 언어의 어쩔 수 없는 무상함을 알고 그 언어세계를 초월한 사람이다.”(107~108쪽) 저자는 간첩의 누명을 쓰고 팍팍한 망명객 생활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중국고전 공부로 얻게 된 성찰과 지혜를 곳곳에 풀어놓아 책 읽는 맛을 더하게 해준다. 저자는 “부귀도 타락시키지 못하고, 빈천도 흔들지 못하고, 위세도 무력도 꺾지 못한다”는 맹자의 ‘호연지기’에서 격려와 위로를 느끼고(56쪽),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으로 한가로운 삶을 추구한 장자의 태도에 서럽도록 놀라워하고(57쪽), “봄비 내리는 황혼이면 비스듬히 동쪽 창가에 기댄 채 멀리 있는 친구를 그리워하면서 유유하게 술잔을 기울이던” 도연명을 사랑한다(58쪽)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대학》을 읽다가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이르러 탄복했다”면서 “이 넉자로 말미암아 선(善)은 초조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119쪽)고 고백한다. 필맥 출판사에서는 우리 사회, 특히 젊은 세대가 적어도 알고는 있어야 할 ‘이유진’이라는 사람의 삶의 내력과 정신세계가 잘 반영된 그의 저서 《나는 봄꽃과 다투지 않는 국화를 사랑한다》(동아일보사, 2001)가 절판돼 시중에서 구할 수 없게 된 점을 안타깝게 생각해, 그에게 연락해 최근의 글을 받아 추가해 넣고 기존의 내용을 수정 보완해 이번에 그 개정판을 내게 됐다.
총 
바보 빅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