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에리 르냉이 보여 주는 또 하나의 비망록
성폭력, 인종 차별, 폭력 등 감춰진 사회 문제를 꺼내어 그 문제의 정곡을 찌르고 분명한 답을 주는 작가로 이름난, 티에리 르냉의 청소년 소설『악마와의 계약』이 출간 되었다. 작가 특유의 묵직한 주제와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이 책은 다비드와 로잔느를 통해 ‘마약’이라는 새로운 환경을 생생하게 포착해 내며 ‘마약은 악마다’라는 힘 있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 작품이 더 돋보이는 것은 마약하는 다비드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새 환경에 충격을 받고 가슴앓이를 하며 성숙하는 로잔느의 성장통을 밀도 있고 마음 저리게 그려 냈기 때문이다.
“중세 때 이야기에 자주 나오는 건데, 그 때는 사람들이 천당도 믿고 지옥도 믿었잖아……그 시절에는 말이야, 만일 네가 부귀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같은 걸 원하면 악마랑 계약을 맺을 수 있다고 했어. 그 대신, 얼마 있다가 악마가 나타나서 네 영혼을 가져가고 넌 영원히 악마의 종이 되겠다고 약속을 해야 돼. 물론 일은 언제나 나쁜 쪽으로 흘러가지. 일단 사랑이든 돈이든 얻게 되면 약속을 지키고 죽고 싶은 사람은 없거든. 하지만 악마에게서 영혼을 다시 살 수는 없는 거지. 마술사의 도움으로 악마와의 계약에서 벗어나는 사람도 있기는 했지만 대개는 미칠 때까지 싸우다가 죽었대.”
“그럼, 오빠도 악마랑 계약을 맺었어?”
“뭘 대가로?”-본문58p 중
우리가 가지는 무언의 질문을 로잔느는 묻는다. 그 질문에 얼버무리기만 하고 가슴이 너무 너무 아파서 마약을 끊지 못한 다비드와 자유롭게 마약을 하는 화가 장 폴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연상케 한다. 요즘 대마초의 자율화와 법적 규제를 주장하는 의견 대립이 공론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텔레비전 뉴스로 토론 주제로 오래 전부터 끊임없이 우리의 시선을 붙잡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잘 모르는‘마약 문제’를 사실적이고 문학적으로, 티에리 르냉을 통해 독자들의 인식과 생각의 물꼬가 넓혀질 것이다.
짧음 속에 또렷이 숨쉬는 풍부한 심리 묘사
주인공 로잔느의 1인칭 시점과 독백으로 이루어진『악마와의 계약』은 짧다. 이야기도 짧고 각 장도 짧으며 문장도 짧다. 이 짧음 속에서 어린 로잔느가 가출을 하고, 다비드를 만나고, 마약 문제를 맞닥뜨리는 드라마틱한 사건들은 새 이야기를 접하는 독자들의 숨소리까지도 흥분시킨다. 이렇게 기복이 심한 분위기 속에서 간결하고 밀도 있게 끊어 낸 단문들은 냉정을 유지하고 줄거리의 팽팽한 긴장감을 놓아 주지 않는다. 사춘기 여자 아이의 감수성을 군더더기 없이 세심하고 간결하게 포착해 낸 문장들 역시 작품의 질을 한층 높여 준다. 우리 이야기여서 불편한 마음이 들 독자들은 깊이 생각하고 흔들리며 로잔느처럼 자기도 모르게 마음의 성장을 겪게 된다.
중고단행본
바보 빅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