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와 신화적 상상력으로 구성한 우리 민족의 대서사시
200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아스피린 두 알'로 등단한 후 문단의 꾸준한 주목을 받아 온 송은일의 신간 '반야'(1, 2)가 출간되었다.
'불꽃섬', '도둑의 누이', '딸꾹질' 등을 통해 다양한 소재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활달하고 단단한 문체 속에 녹여 내 인간의 화해와 공존의 방식을 모색해 온 송은일은, '반야'를 통해 시간을 훌쩍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신화와 설화적 상상력으로 특유의 독특한 서사를 밀도 높게 전개해 나간다. 말맛 좋은 이야기꾼 송은일은 그의 재주를 한껏 드러내 흥미진진하면서도 과장하지 않고 진솔하게 이야기를 풀어내어 역사 소설의 외양을 한 또 하나의 재미난 장편소설을 만들어 냈다.
뛰어난 신기(神氣)를 지니고 태어난 무녀 반야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소설은, 반야를 중심으로 엮어지는 인연들의 슴벅슴벅한 이 생의 삶과, 주변 인물들의 인간적 고뇌와 갈등, 이상 세계 실현을 목표로 세상과 싸워 나가는 비밀조직인 사신계로 이어지는 이상향 등을 아우른다. 이를 통해 송은일은 작가가 지향하는 인간살이의 모습과 문학적 가치관 등을 재미있으면서도 경박하지 않게, 진중하면서도 구성지게 표현해 냈다.
늘 안팎의 억압에 찌들려 살았다는 우리 땅 백성들, 우리 선조들 삶에 태생을 넘어설 수 있는 평등과 자유를 인생의 지표로 삼고 움직였던 사람들이 존재했더라면 재미있지 않을까. 혹은 어딘가에 그런 사람들이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 숨어 있지 않을까.
사신계가 그렇게 오랜 세월 지속될 수 있었던 까닭은 사람살이의 핍진함에 있었다.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는 숱한 사람들의 곤고함이 사신계의 자양분이었다. 유사 이래 무당이 존재했고 존재해야 할 이유와 같다고나 할까. [……] 신과 인간의 매개자로서 사람들의 맺힘을 풀고 고통을 덜어 주는, 진정한 의미의 무녀로 다시 태어난다.
고통이 있는 곳에 꿈과 현실이 어우러진, 눈물과 웃음이 한 장단을 타고 쏟아지는 해원(解寃)과 비원(悲願)의 굿판이 벌어진다. 현실과 비현실이 상통하는 굿판처럼 '반야'도 두 세계를 경계 없이 드나든다. '반야'의 주인공은 반야가 아니라 사신계 사람들이다.
― 작가의 말에서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의 끝없는 투쟁
소설 '반야'는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역사 소설의 면모보다는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인간살이의 궁극적인 면을 보여 주는 소설이라 해야 함이 더 적합할 것이다. 신분의 차이가 엄격했던 시절, 가장 천한 계층이었던 무당 ‘반야’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소설은 조선 시대의 역사에 무게를 두지 않는다. 물론 특정 시대의 이야기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사건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것 또한 실제로 철저하게 작가적 상상력으로 재창조된 또 다른 세계이다.
소설 속 반야는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천하디천한 무녀이지만, 타고난 재주로 자신의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는다. 그리고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보듬고, 엄격한 현실 사회 속에서 모든 사람의 목숨 값이 같은 새로운 이상 세계를 이루어 나가고자 치열하게 싸워 나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상 세계의 실현을 도모하는 비밀조직, 사신계
세상을 호령하는 만파식령, 무녀 반야
소설 '반야' 속에는 주인공 ‘반야’ 외에 또 다른 주인공이 존재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세상을 살아가고, 자신의 삶에 대한 권리를 지닌다(凡人은 有同等自由而以己志로 享生底權利)’라는 평등사상을 강령으로 이상 세계를 이루어 나가고자 하는 ‘사신계’가 바로 그것이다. 엄격한 신분 사회에서 억압당하며, 핍진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야만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꿈같이 먼 이야기이지만 이것을 현실 속에 실현해 나가고자 꿈꾸는 조직이 사신계이다. 작가는 사신계와 반야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모든 사건과, 사람과 사람 간의 인연과, 그들의 삶에 대한 한과 설움, 꿈과 희망, 웃음과 울음을 보여 준다. 결국 소설 자체가 꿈과 현실이 어우러진, 눈물과 웃음이 한 장단을 타고 쏟아지는 해원(解寃)과 비원(悲願)의 굿판인 셈이다.
줄거리
[제1권]
열여섯에 반가의 아녀자 되기를 거부하고 무당 동매의 양녀가 된 유을해의 딸로 태어난 반야는 높은 신기와 빼어난 외모의 꽃각시 보살이자, 별님으로 어린 나이부터 근동에서 이름이 높은 무녀이다.
버려진 어린 목숨들을 거두어 자식으로 삼는 유을해의 아들로 커나는 동마로는 반야를 제 형이자 각시로 생각하며 상투를 튼다. 반야에 대한 연정을 품은 채 동마로는 공세포 바닷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내들과 함께 공부하고 무술을 익히며 그들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그 집단이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강령의 비밀 조직인 사신계임을 알게 된다. 사신계의 명을 따라 얼마간 집을 비우게 된 동마로는 부산포로 이동하여 왜관의 간자를 제거하게 된다.
혼백을 쫓아 용문골에 찾아든 반야는 이한신의 누이 영신의 주검을 연못에서 찾아낸다. 그 일을 계기로 반야의 이름은 더 높아지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적대적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 사건 당시 반야를 보고 반한 김근휘는 강당사에 기도하러 온 반야와 우연히 마주치고 반야에게 매달린다. 반야는 김근휘와, 강당사에서부터 미타원까지 길잡이를 했던 임인, 신기 들렸으나 내림굿은 아니 하고 그 능력으로 벼슬을 높여 보려는 고을 현감 김학주를 품으며 악연을 맺고 이어 나간다. 한편 집을 떠나 사신계의 명을 기다리며 수련하던 동마로는 함께 수련했던 박정생의 누이 새임과 연분을 맺게 된다.
어머니 유을해의 정인이자, 사신계의 경(卿)이기도 한 이한신을 따라 한양에 머물게 된 반야는 혜정원에서 혜정원주를 통해 사신계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귀천도 없고 남녀유별도 없는 동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이라는 말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사신계에 입계한다. 반야는 입계하자 자신이 이미 할머니 동매에 의해 사신계의 일원으로서의 가르침을 받아 왔고, 칠성부의 부령이자 칠요로 지목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칠요는 사신계 전반의 운세를 보고 장래를 점치는 역할을 하는데 예전부터 무녀가 그 역할을 해왔다고 하였다. 칠요의 직분을 받아들인 반야는 수련 과정을 거쳐 칠요가 된다. 한편 다른 지역에서 사신총령을 받들어 수련하던 동마로는 칠요 호위책을 맡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이 호위해야 할 칠요가 다름 아닌 반야임을 알게 되어 놀란다.
[제2권]
칠요의 직분을 받들고 동궁전에 안내된 반야는 상감과의 기세 다툼에 눌러 심화를 겪고 있는 세자의 심화를 다스리다 급격히 쇠약해져 세검정에 머물며 기운을 다스린다. 또한 반야를 만나고자 미타원을 여러 차례 찾던 김근휘는 반야가 없는 새에 미타원을 지키던 동마로의 처 새임을 소실로 삼아 떠난다.
미타원으로 돌아온 반야는 용문골 사건으로 분을 품은 사람들이 방화를 저지를 것을 내다보고, 그들을 사전에 잡아내어 큰 화는 면한다.
이후 다시 한양의 세검정으로 가 궁을 드나들며, 사신계의 일을 돌보며 지내던 반야는 고향 집에 좋지 않은 일이 닥쳤음을 감지한다. 한양에서 벼슬을 하다, 뜬것들에 시달려 벼슬을 내던지고 심리사로 되돌아온 김학주가 미타원을 도적 떼의 소굴로 몰아 유을해와 식구 몇을 잡아 가두고 미타원에 불을 질러 버린 것이다. 이를 수습하러 간 동마로는 밤새 잠든 김학주를 죽이지만, 새 현령에게 덜미가 잡힌다 이에 유을해와 동마로뿐 아니라 반야의 가족들은 목숨을 잃고 만다. 뒤늦게 당도한 반야는 사신계원들이 시신을 거두어 마련한 무덤 앞에서 명복을 비는 경문을 외다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육안마저 잃는다.
육안을 잃은 반야는 세검정에 소소원을 열어 여러 해 동안 고관대작의 점사를 보게 된다. 물론 소소원은 표면적으로 점집이지만, 칠성부의 본원이기도 하다. 세검정 소경 무녀가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게 된 김근휘는 소소원을 찾아 반야를 만난다. 그러나 김근휘를 모르는 양 대하는 반야는 과거의 사람을 멀리하라 이르고 온화한 듯 차가운 태도로 김근휘를 돌려보낸다. 한편 도적 패거리의 일원이 된 임인은 도성을 칠 계획으로 무리를 이끌고 나왔다가 큰 소득 없이 산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반야를 찾아가지만, 반야는 임인도 역시 온화하지만 차갑게 대하면서 도망갈 경로를 일러준다. 하지만 함께 도주하던 부하들이 경로를 바꾸는 바람에 일이 틀어지게 된다. 김근휘는 임인 일당을 잡아 수훈을 세워 보고자 했지만 어디선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정체 모를 일당이 김근휘가 붙잡은 도적 일당을 일시에 죽여 버린다. 또한 그 자리에 있던 김근휘와 수하들 모두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당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 사신계였다.
부적을 만들어 잠시 소원해져 있던 세자 내외에게 2세가 태어날 방책을 썼던 반야는 입궁하여 세자빈의 회임을 확인하고는 중전과 세자 내외에게 하직 인사를 올린다. 궁에서 나오는 길에 반야는 주위에서 느껴지는 살기를 자신이 미리 간파하지 못한 것을 깨닫고 자신이 육안을 잃어버리던 예전처럼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신기도 사라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중고단행본
바보 빅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