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고고학자 슐리만, 150년 전 청일을 가다』는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고고학자로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하인리히 슐리만의 처녀작이다. 세계적인 대상인이 된 그는 1863년 41세 오랜 꿈이었던 트로이 발굴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경제 활동을 중단하고 1865년 3월 세계여행을 하기로 한다. 그 여행 중 청나라와 일본을 40여 일과 한 달간 머무는데 이 책은 그 때 본 청나라와 일본을 기록하고 쓴 기행문이다. 슐리만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유서를 남겨두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급변하는 정치 사회 상황에서 서양인이 개인 자격으로 동양을 여행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아편전쟁 이후 난징조약, 톈진조약, 베이징조약 등의 불평등조약을 맺으며 사회가 급변하고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일본 역시 1852년 함대를 몰고 온 페리 사령관의 강요 아래 쇄국정책을 버리고 일본 정부의 간섭 없는 자유무역과 일본 무역항의 개항을 허가해준 상태였다. 두 나라 모두 서구의 외압 아래 근대화의 바람을 거세게 맞고 있었지만 사회 부패가 극에 달하고 결국 청왕조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중국과 달리 일본은 서구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메이지 유신으로 이행하기 전에 놓인 전환기 사회 특유의 생동감을 책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동시대의 일본과 중국의 모습을 비교해봄으로써, 뒷날 벌어질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게 되는 징후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두 나라의 서로 다른 모습들은 제3자의 시선을 통해 더욱 극명하게 다가온다.
베이징 감상기 - “과거에는 위대하고 창조적인 민족이 살았던 듯”
마르코 폴로가 베이징을 칸발릭이라고 칭하며 그 호화로운 번영상을 기록했던 것처럼, 슐리만도 성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양편으로 끝없이 펼쳐진 성벽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도성 안에서의 구경거리는 이 이방인을 실망시키는 것들이었다. 여관은 역겨울 정도로 지저분했고, 그나마 숙소로 정한 절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도성 안에는 도처에 벌거숭이나 거지 떼들이었고, 주택들은 허물어지거나 그 직전이었다. 거리는 오물투성이에 굶주린 개들이 돌아다녔다. 슐리만은 베이징을 둘러본 감상을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몰락하고 타락한 인종이 거주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위대하고 창조적인 민족이 살았으며, 지금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거리에 단층의 초라한 오두막만 보이지만 옛날에는 화려하게 포장된 거리들과 커다란 집들 그리고 위풍당당한 궁궐들이 있었다는 말이 맞기는 한 것 같다.”
만리장성 보러 왔다는 말에 중국인들은 박장대소
슐리만이 중국에서 가장 보고 싶어 했던 것은 만리장성이었다. 웬 이방인의 출현에 중국 사람들은 하도 궁금해서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왔는지 묻는다. 그리고 만리장성을 보러 왔다는 대답에 그들은 박장대소한다. 오늘날의 관광 코스로 잘 정돈된 만리장성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150년 전에는 버려진 성이었다. 여기저기 무너지고 경사가 심해 간신히 만리장성을 오른 슐리만은 과연 그 명성에 걸맞는 위용에 감탄하고 만다. 하지만 슐리만이 고백하듯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웅장한 만리장성”, “감상할수록 태곳적 거인들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작품”도 주위에는 잡초와 우글거리는 도마뱀으로 가득해 중국의 부패와 몰락을 여실히 보여준다. “말할 것도 없이 만리장성은 인간의 손으로 지어진 것 중에 가장 위대한 건축물이다. 하지만 지금은 위대했던 과거의 묘비가 되어, 장성을 가로지르는 협곡에서 그리고 장성을 뚫고 지나가는 구름 속에서 중국의 몰락을 가져온 부패와 퇴폐에 대하여 침묵으로 항의하고 있다.”
중국의 생활상을 상세히 기록
그 외에도 슐리만은 중국의 전족 풍습과 더불어 옷은 초라해도 신발만은 공들여 치장하는 중국 여성들의 미 가꾸기와 배우들의 연기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경극, 아편의 극심한 폐해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또 슐리만이 보기에 중국은 비문명화되고 비효율적인 사회인데, 조상숭배 풍조로 곳곳마다 자리잡은 무덤 때문에 철도를 개설한다는 것은 앞으로도 턱도 없는 일이며, 중국 정부 역시 권력 유지를 위해 새 것을 두려워하고 변화를 배척한다고 보았다.
당시 일본 여행은 목숨을 건 모험
슐리만은 중국에서 한 달 이상 머물다가 일본으로 갔다. 그는 오래도록 일본 여행을 꿈꾸어 왔는데, 그렇다고 해도 당시 상황에서 서양인이 일본을 여행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했다. 몰락해가는 도쿠가와 막부 정권의 일본에서는 외국에 대한 증오심과 문화적 쇼비니즘으로 가득 찬 척양파 사무라이들이 외국인은 물론이고 개국을 주장하는 자국인들의 암살도 서슴없이 자행하던 때였다. 에도를 방문한 슐리만도 5명의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녀야 했다. 슐리만은 확실히 일본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던 듯, 중국보다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으며, 일본의 의식주 생활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슐리만은 일본을 어떻게 보고 느꼈을까?
온몸이 문신투성이에다 ‘기다란 띠(훈도시)’ 하나 달랑 몸에 걸친 모습하며 이마에서 정수리까지 밀어버린 머리 모양 등의 외관은 물론, 깍듯한 태도와 친절한 모습까지 일본은 중국과 판이했다. 요코하마의 단정하고 간소한 목조 가옥과 분재를 가꾼 아름다운 정원 등 슐리만은 일본에서 받은 인상과 더불어 그 모습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방 안에는 살림살이가 거의 없이 다다미만 깔려 있어 그것이 걸상, 소파, 테이블, 침대 등의 역할을 대신한다며, 유럽인들의 소유 욕구가 대부분은 인위적으로 조장된 것으로서, 일본의 이런 좋은 습관을 본받길 바라는 마음까지 적고 있다.
가장 청결한 민족이면서 남녀가 함께 외설을 즐기는 두 얼굴
슐리만은 “일본은 단연코 세계에서 가장 청결한 민족”이라고 치켜세우지만 남녀혼욕 문화를 보고는 아연실색한다. 30, 40명의 벌거벗은 남녀들을 보고 “아이고, 이 가련한 중생들아!”라는 외침이 그의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온다. 하지만 곧이어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와는 예의범절의 개념이 다른 일본인이 유럽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풍습을 가지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부모형제 한 가족이 함께 혼욕하는 것에 대해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아주 어릴 때부터 남녀 혼탕에 가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들을 질책하거나 비난할 수 없다.”
그리고 의심 많은 통치자들이 국가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남녀 혼욕 관습을 그냥 내버려두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름난 사찰에서 귀족의 첩이 된 유곽 여성들의 초상화들을 보고 놀라는가 하면 남녀가 함께 외설스러운 연극을 보며 좋아하는 모습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남녀가 공중목욕탕을 함께 이용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모든 연령층을 막론하고 여인네들이 도색적인 장면을 보면서 저렇게 즐거워하는 민족의 삶에서 어떻게 그런 청결함과 성스러운 감정이 생겨날 수 있는지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문명은 최고 수준, 도덕관념은 저급’
슐리만이 일본이라는 민족을 보고 느낀 것은 한마디로 ‘문명은 최고 수준, 도덕관념은 저급’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봉건통치의 억압적인 경향과 쇼군 정권의 밀고에 기초한 감찰제도 때문이라고 보았다. “정교하게 엮은 망과 같은 감찰제도는 백성들에게 불신감을 심어주는데 그들에게 상호간 신뢰나 정직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래서 일본인에게서 볼 수 있는 가식은 사회 관습처럼 굳어버렸고 정치제도와 행정제도의 전 메커니즘에 걸쳐서 일상화”되었다. 1865년 당시 에도시대 도쿄의 거리와 상점가 풍경, 사람들의 생활상이 슐리만의 꼼꼼한 기록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특히 보고 들은 것에 대한 피상적인 기록에 그치지 않고 그 민족의 역사나 당시 정세 속에서 그 모습을 관찰하고 있어, 그의 여행기는 단지 감상문을 넘어서서 객관적인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한편, 슐리만의 남다른 통찰력을 알게 해준다. 가방에다 온도계, 자, 거울 등을 지니고 다니면서 수치나 용량, 금액 따위를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는 저자의 모습에서, 당시 사회적으로나 사업적으로 정점에 오른 마흔 살의 문턱을 넘은 백만장자가 뒤에 고고학자로 이름을 날리게 될 면모를 엿볼 수 있다는 것도 이 글이 주는 또 하나의 재미일 것이다.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험난한 만리장성을 혼자 오르는 그의 모습에서는 뒷날 사람들이 한낱 신화라고 믿었던 트로이 이야기를 역사 사실로 믿으며 발굴에 나섰던 그의 투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중고단행본
바보 빅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