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 밭에 씨뿌려질 날이 기다려지네
깨달음이 있는 밭/ 소에게 품삯을 주다/ 뒷산에 더덕을 심은 뜻은?/ 방에 걸어 둔 호미
삼수생 손님/ 농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봄은 가지마다 무르익었네/ 이불재 이야기
사람을 진정 그리워하리/ 이팝나무 꽃을 기다리며/ 종이컵 연등/ 따뜻한 밥을 올리듯
여름 - 밭은 결코 낭만적인 곳이 아니다
밭은 치열하다/ 연못가에 지은 차실/ 새들아, 함께 살자구나/ 연꽃과 같이
깊은 산이 흰 구름 보고 미소하네/ 외로움이 힘이다/ 비 오는 날의 연꽃
이불재 새 식구/ 그리운 태백산/ 연못에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꽃 도반들/ 산중 가족들의 여름나기/ 가랑비 오는 날에 책을 읽다
가을 - 잉걸불에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고구마를 보고 깨닫는다/ 까다로운 고추와 뚝심 좋은 호박/ 잘 커준 감나무야, 나도 고맙다
분수를 지키는 산중 가족/ 땅콩 캐는 날/ 그대의 참 모습은 무엇인가/ 보현이에게
산중 풍경/ 나를 시들게 하는 것들을 경계하다/ 불일암 풍경도 안녕하시다
겨울 - 산중에는 겨울에도 미소가 있다네
콩 한 알에 스민 햇볕과 비바람/ 된서리는 뭇 생명을 성숙케 한다/ 수험생이여, 동백나무를 보라
미소 짓게 하는 무당벌레/ 발자국/ 낙숫물 소리를 들으며/ 목탑에 어린 산사의 추억
따분하긴요, 나무랑 새가 친군데…/ 난로처럼 훈훈한 산중 겨울/ 문수 집을 짓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부처이다/ 삶이 힘겨운 분들께
산중 무지렁이 농부로 돌아가다
[산은 산 물은 물], [암자로 가는 길], [길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 등 불교 색채의 글쓰기와 암자 기행으로 이름난, 작가 정찬주의 남도 산중 생활을 담은 산문집 [소박한 삶]이 출간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20년 넘게 교사와 편집자로 혹은 글을 쓰는 작가로서 살아오던 그는 어느 날 문득 초로의 나이를 맞이한 자신을 보게 되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왔던 꿈 하나를 더 이상 뒤로 미룰 수만은 없었다. 그것은 바람이 스치는 대숲과 솔숲이 있고, 가까운 곳에 물소리가 들리는 작은 개울이 있으며, 차나무를 심는 이웃이 살고 있는 곳에 조그만 집을 지어 무욕無慾의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그렇게 저잣거리의 생활을 청산하고, 늘 마음속에 그리던 남도 산중에 집을 지어 초보 농사꾼으로 들어앉은 지 올해로 3년이 되었다. 산중에 있는 듯 없는 듯 무지렁이 농부처럼 잊혀져 살면서 자연스러운 삶을 좇아 살고자 하는 그의 바람은 솔바람으로 시비에 집착하는 귀를 씻어 불佛을 이룬다는 뜻의 이불재라는 집 이름에 담겨 있다. 이 책에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농사를 짓는 이야기, 자연에 가까이 살면서 주고받는 깨달음, 주변 이웃들과의 나눔의 생활 등 산중의 소소한 일상이 담겨 있다.
온전하게 산다는 것은
그가 처소를 찾아오는 손님들로부터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은 돼 산중으로 내려와 사느냐는 것이다. 그의 대답은 너무도 간명하다. 온전하게 살고 싶어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산중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온전하게 산다는 것은 내가 주인공이 되어 내 정신으로 깨어 있다는 말이다. 온전하게 산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온전하게 산다는 것은 치열하게 개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온전하게 산다는 것은 순리대로 산다는 것이다. 새벽의 총총한 별과 풀잎 끝에 맺힌 이슬과 처소 밖에 만개한 매화꽃, 조그만 연못에 사는 뱀, 산비둘기와 꿩들, 이 산중 가족들이 온전한 삶을 가르치는 스승들이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산중으로 내려와 무소유의 참뜻을 비로소 이해하고 자연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
산중에 있다고 해서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늘 저잣거리에 사는 사람들과 한 뿌리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기에, 저잣거리에서 가슴 시린 소식이 들려오면 그 역시 마찬가지로 아파지는 것이다. 이 시대를 함께 호흡하는 동시대인으로서 산중에서 게으름을 피우거나 자기 질서를 지키지 못한다면 힘들게 사는 저잣거리의 사람들에게 죄를 짓게 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깊은 산이 흰 구름 보고 미소하네
그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총총한 별을 보며 눈을 씻는다. 오전에는 글을 쓰고, 오후에는 도라지와 더덕, 상추, 아욱, 땅콩, 고추 등을 심은 밭에서 밭일을 한다. 연못에 사는 뱀 한 마리와 밭에서 캐는 고구마를 통해 인간의 삶을 되돌아보고, 거짓말하지 않는 땅을 배운다.
그의 방 책상 옆에는 호미 한 자루가 걸려 있다. 그것은 그의 마음 밭을 일구는 화두가 될 것이고 시도 때도 없이 ‘지금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고 물음을 던진다. 호미는 그의 스승이다. 농부들이 말없이 논밭을 갈 때 자신의 글밭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일구려는 뜻에서 호미를 걸어 놓은 것이다. 오늘도 그는 바삐 움직이다 자기를 허물고 마는 흰 구름이 되기보다는 자기 자리를 말없이 지키는 청산의 묵묵함을 닮고자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글을 쓴다.
중고단행본
바보 빅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