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해설_이건제(문학박사)
- 작품개요_핵심정리, 등장인물, 줄거리
1. 윤 직원 영감 귀택지도(歸宅之圖)
2. 무임 승차 기술
3. 서양국 명창 대회
4.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
5. 마음의 빈민굴
6. 관전기(觀戰記)
7. 쇠가 쇠를 낳고
8. 상평통보 서 푼과……
9. 절약의 도락 정신(道樂精神)
10. 실제록(失題錄)
11. 인간 체화(人間滯貨)와 동시에 품 부족 문제(品不足問題), 기타
12. 세계 사업(世界事業) 반절기(半折記)
13. 도끼 자루는 썩어도……〔즉(卽) 당세(當世) 신선(神仙) 놀음의 일척〕
14. 해 저무는 만리장성
15. 망진자(亡泰者)는 호야(胡也)니라
- 작가의 생애와 작품
태평천하의 의미
이 작품은 ‘태평천하’라는 제목부터가 풍자적 성격을 가진다. 일제시대를 태평천하라 한 이는 주인공 윤 직원 자신이었다. 그는, 고맙게도 조선 땅에서 화적패와 탐관오리를 몰아내 준 일본이 이 땅을 공명정대하게 보호·경영해 주는 일을 계속하니 이 아니 태평천하일손가 하는 생각을 품었다. 당대의 억압적 현실에 비추어 보면 이 ‘태평천하’란 말이 지독한 아이러니(irony)로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구한말의 어지러운 사회상과 비교할 때 사실 어떤 사람에게는 일제시대가 태평천하로 여겨질 만도 했다.
채만식의 해방 후 단편 <논 이야기>를 보면 구한말 탐관오리에 의해 논을 빼앗기는 한 생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태평천하》에서 윤 직원의 아버지 윤용규가 겪은 일과 부합한다. 특히 이 윤 직원 집안과 같은 자산가들에게는 탐관오리의 토색질이 더욱 심하였던 바, 결국 이들은 자기 집안에 때때로 잠입하여 각기 다른 이유로 금품을 요구했던 화적패, 동학군, 독립군 등이나 구한말 관리들이나 매 한가지로 도적 무리에 불과하다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일본이 이 혼란을 일거에 정리해 주고, (일단 외형적으로나마) 치안과 법질서의 안정을 가져다 준 것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일제 지배하 조선의 ‘태평천하’는 대개 소수의 자산가에게만 유효하였다. 결국 일제시대 조선인에게도 계급 문제가 존재하였으니, 식민지 억압 상황에 대해 유산 계급과 무산 계급이 실감하는 바는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고, 이 차이를 문제 삼은 채만식은 사회주의에 동조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채만식이 부정적으로 여기는 유산 계급과 그 기생 부류들이 자기가 본래 속했던 나라를 못 믿고, (유교 따위의) 가치관마저 상실하고 나면 의지할 바는 대개 ‘돈’ 정도만 남게 되는데, 이들에게 일본에 대한 충성이나 호의도 실상은 ‘돈’에 대한 충성이나 호의에 불과하였다. 윤 직원의 작은손자 윤종학을 제외한 《태평천하》의 인물들은 바로 이 ‘돈’ 숭배에만 골몰한 형편이었다.
특히, 지주 겸 고리대금업자인 윤 직원은 수령(守令)의 토색질과 화적(火賊)의 약탈 속에 부친 윤용규를 잃어가면서까지 재물은 모은 만큼 편집광적일 정도로 돈에 집착하였다. 이 ‘돈’의 태평천하 속에서 윤 직원 집안사람들의 내면은 썩을 대로 썩어 있었는데, 결국 이 썩은 내면을 흔들어 놓는 게 (사회주의자인) 작은손자 윤종학이었다.
《태평천하》의 문체
《태평천하》의 문체는 조선조 판소리계 소설 문체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할 수 있다. 판소리계 소설은 같은 조선조의 적강(謫降)소설, 영웅소설, 환몽(幻夢)소설 따위에 비하면 리얼리즘적이다.
김인환에 따르면, 다만 끝에 가서 비현실적 문제 해결과 해피엔딩이 출현한다는 점에서 현대 리얼리즘 소설과 다르다. 그래서 판소리계 소설 끝 부분의 비현실적인 면만 없애면 현대 리얼리즘 소설에 근접한 것이 태어날 수 있겠는데, 바로 이러한 착상에 잘 들어맞는 현대소설의 예가 바로 《태평천하》다. 물론, 판소리 사설인 ‘아니리’가 ‘해설자인 작중 화자의 어조’로 쓰이고 있고, 판소리 인물·상황 묘사의 특징인 과장(hyperbole)과 희화화(caricature)가 만연해 있다는 점에서 분명 《태평천하》의 문체는 서구적 리얼리즘 소설의 문체와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나병철에 따르면 판소리적 구어체는, 서구 시민문학과는 달리 민중적인 집단 유대를 바탕으로 한 의사소통 방식으로 《태평천하》로 하여금 리얼리즘을 성취하도록 해 준다. 해설자인 작중 화자의 존댓말을 바탕으로 한 채 화자와
독자 및 독자와 독자 간에 ‘공동체적 유대감’이 형성되고, 이 유대감 속에서 특별히 화자의 목소리가 돌출되지 않는 채 풍자의 리얼리즘은 이루어진다. 대개 풍자는 독립된 양식이기보다 아이러니나 패러디(parody) 등과 어울려 기능한다. 본시 풍자는 추상적이거나 원론적인 악(惡)을 공격하기 보다는, 공동체적 대화의 장을 거부하고 자기의 목소리만 드높이려는 이기심이나 그런 이기적 목소리를 몰래 감추려는 위선이나 그런 이기적 목소리에 포섭된 우둔 따위를 공격한다.
그런데 공격 주체는 공격 대상의 이러한 이기심, 위선, 우둔을 모두 알고 있다고 판단함으로써 스스로가 우월한 위치에 섰다고 여긴다. 이 우월감은 풍자가에게 여유를 안겨 줌으로써 결국 직접적인 욕설은 피한 채 아이러니, 패러디, 과장, 희화화 등을 통해, ‘열등생’인 상대를 에둘러가며 공격할 수 있게 해 준다. 여기서 공격의 칼날은 ‘작품 안’의 ‘열등생’은 물론 ‘작품 바깥’ 현실의 ‘열등생’을 향하기도 한다. 《태평천하》의 칼날 역시 식민지 조선을 ‘태평천하’로 여기는 윤 직원과 같은 자산가와 그 기생 계층을 향해 있다. 그만큼 풍자는 현실적, 정치적인 양식인 것이다.
중고단행본
바보 빅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