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험철학으로서의 담론학 2. 비교 담론학 서설 3. 감성적 언표들 4. 담론의 시대와 언어의 수난 5. 글쓰기에 관하여 6. 보론 :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하여
1997년에 처음 출간된 이 책에서 나는 1990년대에 새롭게 형성되었던 여러 문화적 현상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1980년대에 우리는 사회적, 경제적 모순 속에서 살았고 사유했지만, 1990년대에 이르러 성격이 상당히 다른 모순들이 도래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모순들의 성격이 무엇인지 3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보다 눈에 또렷이 보이는 것 같다. 그런 작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가로지르기||^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번에 출판사를 옮기면서 개정판을 내게 되었으며, 이번 기회에 가로지르기라는 개념에 관련해 제기되었던 두 가지 의문에 답하기로 한다. 우선 "도대체 하나의 담론을 제대로 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수많은 담론들을 할 수가 있는가?", "가로지르기라는 것이 특별한 사람이나 하는 것이지 평범한 사람들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흔히 ||^한 우물을 파라||^고 했듯이 이것저것 가로지르는 것보다는 특정한 분야에 집요하게 몰두하는 것이 나은 것 아닌가?"라는 취지의 의문을 전달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의문들은 내가 생각하는 가로지르기라는 개념을 오해한 데에서 유래한 의문들이다.
우리는 영문학자는 조이스만 연구하고 불문학자는 프루스트만 연구하는 격자화(格子化)를 깨고서 조이스와 프루스트의 관계를 ||^한평생 집요하게||^ 연구할 수 있다. 우리는 한의학자가 연구하는 신체와 예술가가 그리는/조각하는 신체를 전혀 별개로 생각하는 기존 관념을 가로질러 한의학적 기(氣)의 형상화를 위해 ||^한 우물을 팔||^ 수 있다. 우리는 문학적 시간, 물리학적 시간, 역사적 시간 등등을 종합해서 시간 문제에 한평생을 바칠 수도 있다. 요컨대 가로지르기는 이것저것 많이 하는 것도 아니요, 여기저기 방황하는 것도 아니요,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로지르기의 정신은 우리에게 주어진 격자가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 그 격자가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출발하며, 그런 격자에 저항하는 데서 출발한다. 가로지르기는 격자화되기를 거부하는 자유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구할 수 있는 삶의 태도인 것이다.또 하나 가로지르기와 탈주 그리고 무위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되었다. 가로지르기는 본래 학문하는 태도, 보다 넓게는 문화적 활동을 행하는 태도에 관련해 제기되었던 개념이다. 그것은 사회가 강요하는 전공이나 분야에 매몰되지 않는 자유로운 사유 방식을 가리키기 위한 개념이다. 이에 비해 탈주는 들뢰즈와 가타리에게서 유래한 개념으로서, 자본주의가 얼핏 탈코드화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 재코드화함으로써 만들어내는 욕망의 회로를 부수면서 건강하고 창조적인 욕망을 만들어 나가는 행위를 뜻한다. 또 무위(無位)란 본래 임제의현(臨濟義玄)에게서 유래하는 개념으로서 자기에게 부과되는 온갖 규정성들을 끝없이 비워내고 참자아(자아의 無)를 찾아나가는 구도의 길을 가리킨다.
결국 가로지르기는 사유하는 방식을, 탈주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저항을, 무위는 구도의 길을 가리킨다. 가로지르기는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며, 탈주는 그 후 들뢰즈와 가타리의 생각이 가로지르기와 통한다고 생각해서 받아들인 용어법이며, 무위는 선불교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얻어낸 개념이다. 그러나 주안점은 다소 다르더라도 이 세 개념은 궁극적으로 같은 정신/길을 가리키며, 가로지르기라는 말이 이미 다변화되어 사용되고 있는 지금 굳이 이들을 구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총 
바보 빅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