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은 영원하다. 지식엔 죽음이 없다. 지식은 인간을 정복해야만 한다. 바깥의 공기는 일정하지 않다. 제 멋대로 흘러가는 흐름을 지식에 들여놓을 수는 없다. 나는 지금 과학을 하고 있다. 인식론적 과학. 시멘트가 지식을 고정시켜야 한다. 지식은 함부로 변해서는 안 된다. 영구불변한 세계를 지속하려면 지식은 유행이라는 때를 타서는 안 된다.” 김정주의 소설집 <을를에 관한 소묘>맨 앞에 실려 있는 ‘알 수 없는 문’에서 기형적인 지식인 ‘그녀’가 남긴 노트의 한 구절이다. 삶과 생명의 흐름을 거부하고 대문 안에 칩거하며 ‘인식론적 과학’을 하는 그로테스크한 모습의 ‘그녀’와 재봉질을 하면서 삶을 욕망의 흐름에 맡기는 ‘내 친구 그녀’를 왕복하는 ‘나’의 눈에 포착된 우리 삶의 풍경이다. 이성을 거느린 지식이 우리의 생명과 삶을 끊임없이 고착시키려 했다는 것, 그 과정은 시멘트로 온 집안과 책과 자신의 몸뚱이까지 도배질하는 자해행위와 한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탐색한다. <을를에 관한 소묘>에는 ‘알 수 없는 문’을 비롯하여 표제작 <을를에 관한 소묘> <잃어버린 방> <수면 아래 저편> 등 네 편의 중단편을 싣고 있다. 이들 작품에는 “각종 신춘문예와 문학지에 투고했다가 번번이 최종심에서 낙방하고 만” 쓰디쓴 기억을 갖고 있는 작가의 고심과 패기가 곳곳에서 배어있다. ‘잘 생긴 권태’를 겨드랑이에 끼고 ‘원시와 근시와 난시가 어우러진 까막눈’으로 탐골공원에 모여들어 자신들의 과거를 털어놓는 인간들의 대답을 적고 있는, 헛된 삶의 궤적을 묘사하고 있는<을를에 관한 소묘>, 뒤틀린 동성애와 ‘잔혹한 결말’을 그리고 있는<수면 아래 저편>등은 이 작가가 관심을 갖고 추궁하는 게 무엇인지 선명하게 알 수 있다. 그의 소설에서는 우리가 물릴 정도로 보아왔던 30·40대 여성의 쓸쓸한 사랑이나 음울한 고독 따위를 찾아볼 수가 없다. 도저히 40대 중반의 여성이 썼다고 하기 어려울 정도의 유머와 깊이 그리고 폭넓은 시각을 아우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총 
바보 빅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