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모를까. 열정이 불러오는 모든 극적인 상황은 생의 단 한순간, 어쩌면 사소하다고도 할 수 있는 ‘결정적 순간’을 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분출된 ‘열정’이 일상과 행복하게 조우하지 못할 때, 우리가 선택한 ‘결정적 순간’은 돌이키기 힘든 ‘사고’가 된다. 마치 눈앞의 장애물을 인지하면서도 브레이크 대신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버리는, 어처구니없는 교통사고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해 거의 모든 극과 소설에 등장하는 연인들의 이야기는 이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열정’이 온전하게 이해받고 용인되는 비상구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 《자르토리스 부인의 사랑Frau Sartoris》은 바로 그 ‘열정’이, 일상적 안온함을 갈구한다고 믿는 우리의 삶에 어떻게 잠복하며, 예기치 않은 순간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의 뒤통수를 치는지를 일견 평범해 보이는 한 중년여성의 내밀한 자기고백 형식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다. 작가 엘케 슈미터는 자신의 처녀작인 이 소설 《자르토리스 부인의 사랑》에서 개인의 생에 편재하는 다양하고도 상반된 욕망의 색채와 그것이 서로 충돌하며 삶에 뿌리내리는 방식을 독특하고 호소력 있는 작품으로 형상화해내고 있다. 나아가 ‘사랑’이라 이름 붙여진 열정의 위험한 분출로 인해 당혹스러울 만큼 허약하게 전복되는 우리 일상의 단면을 유럽 어느 소도시, ‘자르토리스’라 불리는 한 여성과 그 주변 인물들의 삶을 통해 소름끼치도록 세밀하고 사실적인 풍경으로 그려낸다.
독일의 대표적 좌파 일간지 〈TAZ〉의 편집장을 역임하고,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쥐트도이체 차이퉁〉을 거쳐 현재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저널리스트 엘케 슈미터가 철학적이면서도 상징적 은유 가득한 이 소설을 출간했을 때 ‘문학의 교황’이라 불리는 독일 문학평론가 마르세 라이히-라니키는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내게 커다란 행운”이라고 극찬했다. 또 〈타게스 슈피겔〉은 “모든 극과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모든 소설에 등장하는 연인들을 위한 오마주”라고 평가하면서 한 여성 작가의 성공적 데뷔를 견인했다. 곧바로 이 소설 《자르토리스 부인의 사랑》은 독일 시장은 물론 전세계 15개 언어로 번역되어 독자들을 매료시키며 흔하디흔한 ‘연애소설’의 수준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놓았다.
소설의 시작과 끝이 동일한 문장으로 연결되는 수미상관의 구성, 교양 있고 인내력 강해 보이는 한 여인의 두 차례에 걸친 사랑과 별다른 사건이라곤 좀체 일어나지 않는 소도시의 뺑소니 교통사고를 교차시키는 틀 속에서 작가 엘케 슈미터는 이야기를 매우 치밀하게 구성해나간다. 《자르토리스 부인의 사랑》은 몇 년의 간격을 두고 벌어지는 두 가지 이야기를 때로는 길게, 때로는 단 몇 문장만으로 교직시키면서 이야기의 대단원에 이르러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나게 하는 구조다. 상황을 노골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몽환적 분위기를 톱니 삼아 두 개의 텍스트는 무리없이 호흡을 맞추고, 여기저기 언뜻언뜻 심어놓은 암시들은 두 이야기의 시간 간격이 좁혀질수록 아귀가 맞아들어간다. 그리하여 자르토리스 부인의 사랑이 황량한 뒷모습을 드러내고 도시에서 일어난 교통사고의 윤곽이 잡히는 소설의 종반부에 이를 때쯤 독자들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적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
▣ 조용한 도시를 흔들어 깨운 뺑소니 사고의 정체 일상의 관성으로 가득한 유럽의 소도시 L. 이곳 지역신문에 한 뺑소니 사고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뉴슷거리라고 해봤자 ‘학교 운동회나 상공회의소 개소식, 여기저기 일어나는 절도사건’이 전부인 이 자그마한 도시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기대로 술렁인다. 그것은 사고였을까, 아니면 살인이었을까.
평범한 교통사고마저 줄기차게 사람들의 화젯거리가 되는 이 작은 도시에 지독하게 지루하고 단조로운 일과 가정을 오가는 한 여인이 있다. 그녀, 자르토리스 부인은 정원 딸린 작은 집에 살며 남편을 존중하고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딸 하나를 둔 어머니이다. 의족을 하긴 했지만 지극히 준수하며 자신을 끔찍이 아끼는 남편 에른스트,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가족들에게 헌신하는 시어머니 이르미와 하나뿐인 딸 다니엘라. 만일 그녀가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상처와 욕망을 잠재울 수만 있다면, 일상적 행복을 향한 그녀의 여정은 무리 없이 이어질 것이다. 고조되는 수사의 긴장과 나직한 자르토리스 부인의 고백이 교차되는 가운데, 이야기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웃었던 때’ 과거의 어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 첫사랑의 좌절, 일상의 안온함 속으로 숨어버린 위험한 에너지 순전한 우연이 만들어주었던 필립과의 만남, 그리고 그와 마주보며 추었던 룸바와 차차차. 첫 데이트 때 ‘무릎은 자꾸 서로 부딪혔고’ 아름다운 사랑의 시조차 그녀가 경험하고 느끼는 것보다 훨씬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우며 하찮’게 여겨질 정도로 그녀는 첫사랑의 황홀경을 만끽했다. 달콤한 만큼 분별없던 첫사랑은 그러나 그해 여름이 가기 전에 서둘러 그녀를 떠났다. 아무 일 아닌 것처럼 씌어진 필립의 편지. 그리고 그가 리아네 베스터호프라는, 이웃 도시 은행가의 딸과 약혼한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건 몇 달 간의 정신병원 요양에서 돌아온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더 주저할 것이 없었다. 그녀는 볼링클럽에서 만난 청년 에른스트와 서둘러 결혼했다. 별로 내세울 건 없지만 ‘돈을 제법 벌고 있고, 내 말에도 반대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쉽사리 조종할 수 있는 상대’인 남편 에른스트. 거기에 한마디로 보물과 같은 시어머니 이르미. 유일한 혈육인 딸 다니엘라만이 ‘마치 태어날 때부터 내 아이가 아닌’ 듯 겉돌았지만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녀는 ‘무감각하지만 안락한 행복’ 속에 숨어 ‘무사히’ 마흔을 넘기고 있었다.
▣ 그녀를 지키기에는 너무 허약한 일상의 울타리 상처는 종종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약으로 발효되지만 더 많은 경우 턱없는 결핍감과 갈망으로 싹을 틔운다.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딸 다니엘라의 열세 번째 생일 즈음, 미하엘이란 유부남의 손쉬운 유혹 앞에서 발효되지 못한 채 오랫동안 숨죽이고 있던 그녀의 상처는 불온한 열망으로 되살아난다. 그리고 의식하지 못했지만, 거의 20년 동안이나 좌절한 필립과의 첫사랑을 끌어안고 살아왔음을 자르토리스 부인은 그제야 깨닫는다.
끝을 확인하지도 못한 채 무릎 꿇리고 만 사랑을 다시 일으켜세우고 싶었다. 이제 도시의 문화국장인 미하엘이 그 열정의 새로운 시작이자 끝이 될 거라 믿었다. 그녀는 ‘먹이를 기다리는 짐승처럼’ 미하엘과의 연애에 몰두했다. 스스로가 ‘스무살이 된 것처럼.’ 마흔이 넘어 다시 깨어난 자르토리스 부인의 열정은 첫사랑의 상처와 거기서 비롯된 끝없는 결핍감, 그리고 무모한 갈망으로 뒤범벅이 되었고, 급기야 미하엘과의 야반도주를 계획하기에 이른다. 사실 신혼여행 첫날 자살을 꿈꿨을 만큼 불안하게 출발한 에른스트와의 결혼 생활은 안중에 없었다. 지난 20년은 ‘이미 퇴색하여 희미해져버린’ 과거일 뿐이었다. 그녀는 ‘숫자만 없을 뿐 영수증이나 마찬가지’인 편지 한 장만 에른스트에게 남기고 집을 나섰다.
▣ 열정이 휩쓸고 간 황량한 자리 하지만, 온전하지 않은 연애를 지속시키자고, 전통 있는 제과점을 열세 개나 상속받은 아내와 잘 자란 두 아들과 시청의 문화국장이라는 타이틀까지 반납하며 ‘대재앙’을 자처할 남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열정에 눈먼 그녀만이 단순하기 그지없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채 ‘새로운 열망’에 달떴을 뿐이다.
신새벽의 세 시간 동안 온갖 상상을 하며 미하엘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결국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주방에서는 남편 에른스트가 편지를 든 채 표정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지점과 겹쳐지는 다른 쪽에서 경찰이 그녀의 집을 두드린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들에 대해 굉장히 놀라시겠지요. 아니, 분명히 경악하실 겁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 끝없이 반복되는 악순환, 그것의 예측 불가능한 미래 수포로 돌아간 새 삶에 대한 기대, 산산이 조각난 두 번째 사랑은 그녀에게서 젊음과 판단력과 모든 희망까지 거두어갔다. 다른 남자를 가슴에 품은 대가로 신경쇠약에 걸려버린 아내를 이해하지도 용서하지도 못한 채 절망하는 에른스트와의 부부생활, 그리고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빠르게 성장해버린’ 다니엘라와의 새로운 관계만이 그녀 앞에 펼쳐졌다.
친구와 술을 마시러 들어간 바에서 다니엘라와, 자신의 딸을 마치 ‘짐승이라도 되는 듯이’ 쥐고 흔드는 남자를 목격한 이후 그녀의 남은 에너지는 또다시 파괴적으로 펄펄 끓어오른다. 자신과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다니엘라의 부주의한 열정은 자르토리스 부인의 삶을 통째로 집어삼킨 두 차례의 사랑과 한 치도 어긋남 없이 닮아 있었다. 딸의 위태로운 사랑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다니엘라를 정복한 남자는 아이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제 한 달만 있으면 딸은 성인이 되어 자신의 손을 떠날 것이다. 초조한 시간은 자꾸자꾸 지나갔다. 그리고 여러 달이 지난 어느 비오는 저녁, 그 길가에 그가 서 있었다.
엘케 슈미터는 평범하고 예측가능하며 지리멸렬하기 십상인 우리의 삶, 그 안에서 출몰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을 자르토리스 부인이라는 한 여성의 두 차례에 걸친 사랑과 뺑소니 교통사고라는 미스테리 구조 속에 흥미진진하게 녹여낸다. 〈디 보헤〉가 이 작품을 두고 “한 작은 소도시에서 타의로 맺어진 인간관계의 내적, 외적 세계를 뛰어난 관찰력과 상세하고 정확한 서술, 풍부한 상상력으로 재구성해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한 것은 정확한 해석이다. 철학을 전공한 지식인답게 인간 심리의 저 깊은 곳까지 찬찬히 파고드는 사유의 집중력, 연애소설이 범하기 쉬운 어설픈 낭만성을 철저히 배제한 캐릭터 창조, 시적 상징과 은유 가득한 문장, 두 개의 텍스트를 숨가쁘게 교차시키며 그 안에서 수십 개의 이야기 층을 쌓아올리는 소설가로서의 견실함까지…….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엘케 슈미터의 장편소설 《자르토리스 부인의 사랑》은 독자들에게 모처럼 격조 있는 연애소설과 만나는 독서의 즐거움을 제공할 것이다.
총 
바보 빅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