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없는 그림책 글자가 없이 그림만으로 이루어진 책을 접한 많은 독자들은 먼저 당황스러워한다. 읽을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어른은 글자를 읽고 어린이가 그림을 감상(!)하는 일반적인 구도에 익숙한 독자라면, ‘글자 없는 그림책’이 무척 새로운 시도로 느껴지겠지만, ‘그림’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그리 생소한 것만도 아니다. 그림이라는 것이 애초에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먼 옛날의 동굴 벽화가 그랬던 것처럼 현대의 모든 그림들도 작가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려진다. 그림 자체에 이미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아예 이야기 속의 한 장면을 그린 것 같은 그림도 많다. <<높이 더 높이>>의 작가 셜리 휴즈를 어린 시절부터 사로잡았던 것들도 바로 이렇게 이야기를 들려 주는 그림들이었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림 셜리 휴즈는 영국의 조용한 해변 마을 워렐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어린 시절 대부분은 전쟁 중에 보내야 했다.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곧 놀이였던 셜리 휴즈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동생들에게 들려 주며 작가로서의 꿈을 키워갔다. 하지만 무엇보다 셜리 휴즈의 어린 시절을 좌우한 것은 리버풀에 있는 워커 갤러리였다. 드가의 그림과 같이 ‘서사적인 그림 (narrative painting)' 이 가득한 그곳에서 어린 셜리 휴즈는 이야기를 들려 주는 그림에 강한 인상을 받았고, 이것은 그녀의 일생을 지배하였다. 셜리 휴즈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은 펜과 잉크, 수채화와 구아슈(불투명 수채화)로 이루어내는 자연스러운 효과에 있다. 특히 그녀의 스케치는, 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빠르다. 이것은 그녀가 집안에서, 놀이터에서, 공원에서 시간을 들여 지켜보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실제로 셜리 휴즈는 어린이들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그림책을 많이 만들었다. 그녀의 주인공들은 현실의 어린이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일상성에서 획득한 설득력 있는 상상 어린이가 하늘을 난다는 <<높이 더 높이>>의 판타지조차 주인공이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고 노는 일상적인 그림에서 시작한다. 지나가는 새를 보고 따라 날고 싶어서 정성껏 날개를 그려 만드는 그림도 사실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아이가 하늘을 날게 된 것이 배달된 무엇인가를 먹은 다음부터라는 설정이다. 그것의 모양은 새의 알을 연상시키지만, 아이가 먹는 모양을 보아서는 초콜릿 같기도 하다(어린이마다 다른 해석이 나올 것이다). 다른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그것을 몽땅 먹어치우고 나서 아이는 드디어 날기 시작한다. 그 다음부터는 일대 소동이 일어난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주인공을 따라다니지만, 표정은 제각각이다. 걱정하는 사람, 화를 내는 사람, 재미있어 하는 사람, 부러워하는 사람. 놀림을 받았다고 생각한 한 어른은 아이를 붙잡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끝끝내 성공하지는 못한다. 사뿐히 착지해 제자리로 돌아온 아이 앞에 처음처럼 새 한 마리가 지나가지만, 이번엔 그다지 아이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역시, 어린이의 심리를 잘 알고 있는 작가답다.
*무성영화 한 편의 재미와 감동 셜리 휴즈의 그림은 2도인데다가 고전적인 기법으로 그려진 덕분에 더욱 오래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런 그림의 배치가 만화의 구도를 따르고 있어, 속도감 있는 비주얼에 익숙한 요즘 어린이들에게도 쉽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글자가 없는 그림책이지만 충분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히려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책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기도 좋고, 어린이가 혼자 보더라도 마음껏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다. 꼭 말로 하지 않더라도 멋진 무성 영화를 보는 것처럼 어린이는 자신만의 작품 하나를 간직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글자 없는 그림책만의 매력 아닐까.
*그림으로 읽는 줄거리 하늘을 나는 것이 꿈인 한 아이가 있다. 풍선을 여러 개 들고 날아오르기를 시도해 보거나 날개를 그려 몸에 달아 보기도 하지만, 모두 마땅치가 않다. 그 때 아이에게 배달 된 것은 커다란 알 모양 초콜릿. 안에 들어가서 먹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초콜릿을 다 먹어 치운 다음 아이는 점점 높이 올라가 하늘을 휘젓고 다닐 수 있게 된다. 걱정을 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며 뒤쫓는 어른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실컷 놀이를 마친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온다.
총 
바보 빅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