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어우러진 로망 - 낭만적 역사소설
‘고다이버 1,2’는 역사소설의 미덕에 충실한 소설이다. 그리고 역사적 서사구조의 담대함과 굽이치는 역사에 몸을 던진 사람들의 가쁜 숨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소설의 주인공은 천년 전 잉글랜드를 흠뻑 매혹시켰던 백작부인, 무거운 세금에 허덕이는 주민들을 위해 누드로 말을 타고 다운타운을 순례한 고다이버(Godiva)이다. 아울러 해럴드 2세, 정복왕 윌리엄 등 역사 인물들의 삶과 함께 우리에게 조금 낮선 중세의 한 시대-1057년 이후 30년간의 격변의 잉글랜드를 그리고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당시의 잉글랜드인 모두거나 또 잉글랜드 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이 소설은 익히 알려진 고다이버와 피핑탐 스토리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영주의 아내인 귀족의 신분으로 누드로 말을 탄 경천동지할 사건이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아니다. 사건은 단지 그녀가 부딪치며 헤쳐 갈 잉글랜드 역사의 시작일 뿐이다. 당시의 잉글랜드는 봉건제가 뿌리내리기 시작하는 변혁기로 고다이버가 일생동안 4개의 가문에서 9명의 왕이 등장하는 것을 지켜보았을 정도로 치열했던 시대였다. 그 혼란의 시대에 한 젊고 아름다운 백작부인 또한 권력투쟁과 전쟁과 망명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작가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을 굽이치는 역사의 물결과 한데 섞는다. 그녀는 때론 역사에 떠밀려 가는 배가 되고, 또 때론 강물 자체가 되어 역사를 만들어 가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는 그녀의 연민과 용기로 가득 찬 누드 사건, 왕권을 노리는 유럽 귀족들의 야망, 잉글랜드의 운명을 가늠하는 전쟁, 그리고 무두장이 출신의 사랑의 히어로마저도 역사의 서사 속에 함께 통으로 엮여든다. 역사적 사건과 소설적 재미를 한데 엮어내는 작가의 이야기 솜씨는 상상력과 팩트의 직조를 넘어 가히 융합이라 할만하다.
역사적 사건들을 상상력으로 재조직하여 소설적 재미의 옷을 입히고 역사적 개연성을 재현하는 것, 그리고 역사를 만들어 갔던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탐구, 이런 것을 일러 역사소설의 품격을 따지는 기준들이라 사람들은 말한다. 많은 것을 양보한다 하더라도 이 소설에서 작가가 선보인 상상력과 역사적 사실을 하나로 직조하는 솜씨만큼은 단연 압권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끝까지 밀고 가는 이야기의 동력은 한 위대한 영웅도 영웅적 서사구조도 아닌 바로 사랑이다. 영웅 대신에 사랑을, 역사의 의지 대신에 삶의 번민을 축으로 삼은 작가의 선택은 이 소설을 한결 재미있게 만들었다. 역사를 딛고 성취하는 로망, 소작농과 백작부인의 사랑, 왕과 귀족들의 연정이 만들어가는 궁정의 속내, 이 소설은 낭만적 역사소설이라 부르는 게 제격이다.
매혹적인 백작부인에 대한 오마쥬와 변주
이 소설에서 고다이버 스토리는 이후 잉글랜드에서 펼쳐질 굽이치는 역사의 기폭제다. 춘향과 이도령은 그 후로 오랫동안 행복했을까? 그들의 고진감래의 사랑이 또 다른 역사를 촉발하지는 않았을까? 이런 궁금증이 드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 법. 작가의 관심은 고다이버 사건 이후에 펼쳐지는 드라마에 있다. 그 사건은 사람들을 엮고 사건과 사건을 이으며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 간다. 그 사건의 파장과 관련 인물들이 실제 잉글랜드 역사를 그리 만든 것처럼 참으로 교묘하게 이후의 역사에 스며든다. 마치 실제의 역사가 그녀를 정점에 두고 사랑과 질투에 의해 조종되었다는 듯이. 하긴 한나절 동안의 누드보다도 사건 이후의 굽이치는 역사가 훨씬 드라마틱하고 더 매력적인 것은 분명하다. 방자가 춘향을 사랑했다면 또 어떨까? 이 소설에는 익숙한 고다이버 스토리에 대한 변주가 있다. 늙은 피핑탐(Peeping Tom)은 죽고 젊은 피핑탐은 살아 백작부인과의 사랑을 꿈꾼다. 이 소설은 앨드볼드라는 젊은 견습재단사의 순진무구한 사랑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 사랑의 기록이 놀랍게도 잉글랜드의 역사와 또 맞물린다.
이 고다이버 스토리에 대한 변주는 매우 독창적이다. 그 기발함이 고다이버를 이후의 사건의 전개에 깊숙이 끌어들이는 자장이 되고 있다. 한 사람의 사랑과 삶을 역사를 바꾸는 동력으로 묘사하는 것만큼 커다란 찬사는 없다. 따라서 이 소설은 시민적 권리의 대변자 고다이버에 대한 오마쥬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피핑탐과 고다이버의 스토리는 에로티시즘의 주제로, 관음증과 이에 대한 사회적 응징의 교훈을 제공해 왔다. 페미니즘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는 그것의 반복과 답습에 얽매이지 않는다. 작가가 만나고 싶은 고다이버는 역사의 전면에서 고뇌하고 분투하는 고다이버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잉글랜드 변혁의 시대를 그녀의 사랑과 삶을 통해 파노라마처럼 그린다. 그것은 역사를 로망으로 채색하고 로망을 역사가 도와주는 구조다. 이 구조의 튼튼함에 힘입어 음모와 가문간의 권력투쟁, 전쟁과 정복마저도 사랑의 낭만적 파노라마 속에서 하나가 된다. 문학의 영역에서 성공한 변주는 또 다른 역사를 독자들에게 선물하고, 그리고 한편의 역사소설은 또 다른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중세의 역사와 만나는 지식의 성찬
이 소설에는 자신의 소명이 잉글랜드를 정복하는 것이라 믿는 공작, 자신이 왕이 되어야 된다고 유럽을 떠돌며 전쟁을 자처하는 고집불통, 잉글랜드의 통일과 위대한 제국을 꿈꾸는 백작의 분노와 열정 등 당시를 풍미하던 역사적 실존인물들의 삶과 투쟁이 고다이버를 중심으로 얽히고설키며 한편의 역사가 된다. 영원한 제국의 이미지로 각인된 잉글랜드의 노르망디에 의한 정복과 역사의 재편, 봉건제의 질곡과 귀족과 농민들의 삶과 사랑, 왕의 죽음과 왕권쟁탈전, 교회의 역할과 성직자들의 정치, 유럽을 휩쓴 그 수많은 침략과 정복의 전쟁들, 잉글랜드 왕권을 정점으로 한 유럽 왕가들의 이합집산 등등, 이 소설은 11세기 잉글랜드와 유럽사를 통달하게 하는 역사책이라 할 수 있다. 그 역사의 한 대목을 인물들의 한숨소리와 허풍과 질투와 심지어 음흉한 미소에까지 공감하며 꿰뚫게 된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이 소설은 가치 있다. 이 소설에는 고다이버 부인의 삶과 사랑이라는 한편의 드라마가 있다. 그 드라마는 역사적 성찰, 인간에 대한 이해, 사랑에 대한 관조, 역사의 뒷이야기, 권력의 무상함까지 담겨있다. 처녀작을 낸 작가의 이야기 솜씨치고는 빼어나다. 그리고 재미있다.
중고단행본
바보 빅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