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고 허망하고 박탈당한 것들
보이지 않는 존재와 관련된 일
마음은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았다
겨울산에 서 있는 참나무의 생각
거칠고 광포하고 휘몰아치는 것들
사랑은 인생에 한 번이면 충분하다
박새가 알고 있는 몇 가지 사실
미끄러지고 헝클어지고 어긋나는 것들
한 십 년 잠 속에서 총소리가 났다
청설모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
시조 한 수로 하루를 산다
바람은 투신하는 노을을 보았을 뿐
빛나고 충만하며 서러운 것들
거침없는 상상력, 인간과 우주에 대한 넓고 깊은 사유
무미한 일상에 드리운 사랑과 성, 그리고 죽음의 문제까지, 비밀스럽고도 위험한 주제를 폭넓은 사유와 거침없는 상상력으로 천착해온 작가 김형경의 신작 장편 [성에]가 출간되었다. 사랑에 관한 모든 오해와 편견을 낱낱이 파헤치고 그 아픈 실체를 드러내보였던 장편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전2권) ]이후 2년 반 만에 발표하는 다섯 번째 장편이다.
그래서일까? 소설 전편에는 산으로 대표되는 자연의 이미지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또한 인간을 포함한 나무와 새, 바람까지를 화자로 내세워 거침없는 상상력을 펼쳐 보이는 한편, 보다 폭넓고 내밀한 우주의 질서까지를 품에 안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인다. 이는 작가가 그동안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왔던 여성성의 문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여주는 것이며, 우주적인 비의까지 끌어안고자 하는 김형경 문학의 새로운 시발점으로서도 의미를 갖는다.
환상을 선택하는 특별한 조건
누군가 '인간은 환상 없이 살 수 있는가?'라고 물어온다면, '환상을 버리지 마라. 환상이 사라져버리면 존재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을 대답으로 던질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는 이번 소설에서 우리 삶의 곳곳에 깃들어 있는 바로 그 ‘환상’에 관해 이야기한다. 꿈같고 허망한 것, 밝은 빛 앞에선 한순간에 사라지는 유리창의 ‘성에’와도 같이 아슬아슬한 것,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비밀스럽게 가슴에 품었음직하고 그로 인해 갈등해보았음직한 것, 이 생에선 결코 이루어질 수 없기에 끝끝내 갈망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그 ‘아쉽고 허망하고 박탈당한 것들’이 삶에 미치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 천착한다.
소설을 통해 하나하나 그것들을 확인해가는 과정은 지독할 만큼 예리해서 때로는 둔한 통증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그 전 과정을 통해 작가는 비로소 삶에 뿌리내린 환상의 실체를 드러내 보이고 끝끝내 필수불가결한 생의 에너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확인시킨다. 하지만 작가는 결코 피할 수도 없고, 피할 필요도 없는 환상을 함부로 삶에 끌어들이는 것에는 일침을 가한다. 그런 무모함으로 인해 전 생애를 뒤흔들 만큼의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성에]는 사랑과 성, 유토피아 등 우리의 삶에 깃들어 있는 환상에 대한 주의 깊고 세밀한 고찰이면서, 동시에 그 환상을 (그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쉬이 놓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 ‘아쉽고 허망하고 박탈당한 것’을 슬기롭게 유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지침서이기도 하다. 연희의 입을 통해 작가가 전하는 바, 환상을 ‘마음껏 빛나고 아름다운 것, 현실과 무관하며 허황된 것, 가장 충만해서 서러운 것’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비루하고 지리멸렬한 생을 지탱시켜 줄 각별한 에너지 하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의 진정성에 대한 고집스럽고도 장엄한 탐구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작가가 전하는 ‘환상’의 이상적인 모습은 바로 소설을 포함한 예술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김형경이 [성에]를 통해 거듭 강조하고 있는 ‘환상’이란 주제는 우리 시대 문학의 진정성에 대한 의미 있는 문제 제기인 셈이다.
성과 죽음에 대한 모든 비밀과 암호를 파헤쳐 우주의 비의를 읽어내려는 열망으로 가득하다
[성에]는 또한 독특한 3중의 서사구조를 취하고 있다. 비밀스럽고도 주술적인 산속 외딴집으로 초대된 두 남녀(연희와 세중)와 그들을 그곳으로 이끈 세 남녀(남자, 사내, 여자로 지칭됨)의 이야기를 변주곡처럼 교차시키며, 그 사이에 사체로 남은 세 남녀를 지켜보았던 자연물들의 진술을 배치시키고 있다. 이처럼 빈틈없이 꽉 차인 서사구조와 다양한 화자들을 내세워 작가가 끈질기게 탐구해 들어가는 또 하나의 주제는 바로 성과 죽음의 문제이다.
폭설 내린 산속에 고립된 연희와 세중이 7일 동안 체험했던 죽음과도 같은 적멸감과 공포, 그리고 그 극단의 상황에서 광기에 들린 듯이 몰입했던 성애(性愛). 산속에 살던 세 남녀의 아슬아슬한 성의 공유와 그로 인해 벌어지는 처참한 죽음. 그들을 지켜본 생물인 참나무, 박새, 청설모가 인간의 우매함을 질타하면서 전하는 짝짓기에 대한 자연의 섭리. 무생물인 바람의 눈에 비친 유한한 생물들의 짝짓기에 대한 끝없는 욕망과 그 덧없음까지…….
작가는 이 모든 화자들을 통해 성과 죽음을 둘러싼 우주의 모든 비밀과 암호를 풀어내고자 한다.
중고단행본
바보 빅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