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판화가 이철수가 힘겨운 세상에게 보내는 따뜻한 마음의 편지
‘그림으로 시를 쓴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우리 시대 대표적인 판화가 이철수가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 밥 한 그릇의 행복-물 한 그릇의 기쁨>(삼인)을 펴냈다. 그의 홈페이지 이철수의 집(www.mokpan.com)을 통해 2003년 1월부터 거의 매일같이 보냈던 엽서들을 엮은 것이다. 2년여 동안 보낸 엽서글 속에는 농부 이철수의 땀, 판화가 이철수의 작업, 시골 사람 이철수의 이웃 그리고 자연과의 교감 등이 그날의 일상 그대로 담겨 있다. 대부분 짧은 편지글의 형식이지만 그의 산문들은 그의 판화만큼이나 여운이 깊다. 자연과 세상에 관한 그의 통찰은 우리에게 지혜의 말씀처럼 다가와 스스로 매무새를 고쳐 앉게 하기도 하고, 농사와 이웃들의 이야기들은 구수한 입담처럼 넉넉한 웃음을 불러내고 있다. 이 책, <밥 한 그릇의 행복-물 한 그릇의 기쁨>에는 이철수가 세상과 이웃에 더 다가가 좀더 따뜻하게 껴안고자 하는 그대로의 마음이 오롯하게 담겨 있다. 여기에 실린 작고 소박한 ‘마음의 조각’들에 대해 이철수는 스스로 ‘때로 횡설수설이 되기도 하고, 보내고 나서 후회하는 날도 있었다’고 고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도 ‘그게 내 마음의 자취인 걸 어떻게 하겠’는가 ‘마음이 어지러우니 짧은 엽서 속에 그걸 다 감출 수는 없는’ 일이라고 담박하게 말하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그냥 국수가 아니라 손칼국수를 찾는 것 같은 그런 마음, 손으로 쓴 편지를 받고 가슴이 따뜻해지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기를, 그리고 그 기억만큼 세상이 좀더 따뜻’해지기를 그는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본격 판화 작업이 아닌 ‘엽서’라는 형식을 통해 이철수는 일상 생활과 반성, 자연과 더불어 얻어내는 선적인 체험의 작은 편린들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그가 소소한 일상의 사건(?)들에서 얻은 느낌들에서 무엇을 어떻게 육화해 ‘발견’에 가까운 판화 작품으로 펼쳐내고 있는가 하는 작품의 모티브까지 엿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책에 실린 190여 통 엽서에서 판화 작품만이 아닌 가볍게 힘을 빼고 그려 넣은 이철수의 ‘프리한’ 드로잉을 처음으로 만나는, 색다른 즐거움까지 더할 것이다.
일기처럼 하루하루 성찰하는 낮은 마음의 깊은 여운
<이철수의 나뭇잎편지-밥 한 그릇의 행복, 물 한 그릇의 기쁨>은 겨울/ 봄/ 여름/가을 4부로 엮어 계절에 따라 자연이 변화하는 모습과 농촌의 일들을 좀더 쉽게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철수가 보낸 하나하나의 엽서 속에는 그저 흘러가는 듯 보이는 일상 속에서도 봄의 모심기와 가을의 추수 등의 농사일과 맞물려 봄의 활기와 가을의 사색 등 작가의 느낌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일과 반성을 통한 이철수의 세상 읽기는 그동안 보아왔던 그의 작품세계-자연과의 교감, 일상에서 체득하는 선에 가까운 깨달음, 세상을 읽어내는 날카로움과 위트-를 더 진솔하게 더 구체적으로 더 풍요롭게 확장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이 한편 한편 독립된 이야기면서 마치 연작소설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비록 본격적인 작품이 아닌 간단한 편지글일지라도-아마 일과 작품이 한 자리에 있다고 생각해온 이철수의 오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등교하는 아이에 관한 아주 작은 개인 생활의 에피소드에서 이라크 파병 같은 국가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어찌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들쑥날쑥 섞여 있는 듯하지만 거기에는 ‘낮은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한 사람의 일관된 세상읽기가 있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엽서 속 이야기들은 한 편의 짧은 소설처럼 재미있다. 마치 페이지마다 삽화가 들어 있는 엽편(葉篇)소설처럼 읽힌다. 이를테면, ‘늦잠 자고, 아내도 나와 함께 늦잠 자고 다정하게 깨어 너무 밝아져버린 아침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날… 조금 게을러진 하루, 용서받고 싶다’(148쪽) 속의 이야기는 아마 그 전날, 어떤 고단한 일상이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아내와 함께’ 일찍 일어나지 못했는데, 그래도 그것은 자신이 정말 잘못(농부에게 늦잠은 죄악에 가깝다)했다는 것이며, 어떻게 숨을 수 없는 ‘너무 밝아져 버린(대명천지에)’ ‘용서(용서를 받겠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했을 때 가능한 말이다)를 구하고 있다. 용서를 받고 싶은 쪽도, 용서를 하는 쪽도 모두 그 자신일 것은 분명하다. 짧은 이야기와 한 컷의 그림 속에 어떤 소박한 삶의 의미 있는 메시지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박한 삶의 메시지와 많은 비유들은 한결같이 따뜻하다. 한편 그가 자신의 삶과 똑같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이 힘겨운 시절을 견뎌내는 생명과 이웃들이다. 그의 이웃은 젊은이들이 대부분 떠나버린 농촌마을의 평생농부들이며(46쪽), 한겨울에도 작업을 하고 있는 일용 노동자들이며(23쪽), 그리고 말없이 조용한 식물들(109, 134쪽)과 한겨울의 작은 짐승들(195쪽)이다. 그는 그 이웃들에게 속없이 당하지만 말고 ‘부디 한 걸음 나아가게 되기를’ 바라면서(69쪽) ‘천천히, 지혜롭게, 그러나 분명하고 단호하게!’라고 삶에 용기를 북돋기도 하고, ‘누군가 내민 손을 잡으’라고(11쪽) 권하기도 한다.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 밥 한 그릇의 행복-물 한 그릇의 기쁨>을 통해 이철수는 뜨거웠던 1980년대와 선적 세계에 심취했던 1990년 대를 지나 지금 “저는 지금 여기에 이렇게 살면서 좋은 이웃들과 함께 더 따뜻하고 당당한 세상을 소망합니다. 힘내세요. 좋아질 겁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절망, 그 절반은 바깥세상에 있지만, 나머지 절반은 우리 마음속에 희망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풀잎처럼 낮고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전하고 싶은 것이리라. 좀더 낮은 자리에서 더 가까이 더 따뜻하게.
중고단행본
바보 빅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