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어린 시절
은사 이야기｜잊을 수 없는 고향
제2부 전쟁과 혁명
한국전쟁의 비극 속에서｜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일본과 미국에 다녀와서
제3부 민주화 투쟁, 그리고 새로운 희망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쓰다｜민주화 투쟁 속에서｜군사정권의 종언을 향 하여｜귀국하고 나서｜화해와 협력의 공동체를 꿈꾸며
식민지 시절부터 민주정부 수립까지, “우리들은 이렇게 살아왔다.”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 바 있다. 과거와 현재의 지속적인 상호작용, 끊임없는 대화가 바로 역사라는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지난 백 년간 감당하기 어려운 역사적 부침에 휩쓸리고 부딪치며 생존해왔다. 특히나 일제의 억압이 극심하던 1920년대에 태어나 21세기 신자유주의 정치체제, IT 기술혁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파란 많은 한평생을 살아온 기성세대들이라면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렇게 살아왔다”고.
나라를 잃어버렸고 외세의 도움으로 겨우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해방의 은인이기도 한 그 외세에 의해 수천 년간 대대로 살아온 강산은 피로 물들었고, 그렇게 3년을 싸운 후에야 겨우 전쟁을 멈추었다. 풀뿌리로 연명해야 했던 비참한 빈곤, 독재정치는 사람들의 육체와 정신을 황폐화했다. 1960년엔 학생들이, 그리고 1980년엔 광주의 민중들이 봉기했고 그러한 혁명은 반동적인 군부도당의 총칼에 압살당했다. 민주주의는 회복했지만 이번에는 나라 경제가 결딴나 수많은 사람이 나락에 떨어져버렸다. 과거 어느 때보다 풍요한 세상이 되었지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격차는 무서우리만치 벌어지고 있다. 수세기에 걸쳐 일어날 법한 거대한 사건들이,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는 역사라는 시간의 연쇄에서 보면 그리 길지도 않은 백 년이라는 시간으로 압축되어 폭발했다. 정말 우리들은 이런 시대를 살아온 것이다. 그 역사의 광풍 속에서 한편으로는 강인하게 연단되었고 또 한편 너나 할 것 없이 걍팍해졌으며 지혜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용기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우리 역사는 영광의 기록이든 수치스러운 오욕의 기록이든 오늘을 사는 우리의 자산이다. 식민 지배와 동족상
잔의 전쟁, 빈곤과 독재의 어두운 기억은 여전히 우리 주위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우리는 이 그늘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더 똑바로 지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하고 그것을 껴안고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이 책은 식민지 시대와 해방, 분단과 전쟁, 독재에 대항한 민중투쟁 한가운데에서 고뇌하고 실천하며 살아온 한 지식인의 가슴 아픈 증언이자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우리가 겪지 못했던” “암울한 시대”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어찌하면 외세에 휘둘리지 않고 야만적인 전쟁에 휩쓸리지 않으며 화해와 관용의 큰 바다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세기의 출발점에서 지난 세기를 아프게 돌아보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화두를 부여잡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과 혁명의 불길을 헤쳐온 한 지식인의 고뇌
지명관은 192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당시 정주는 압록강을 넘나들던 항일 독립군의 무장투쟁이 활발했던 고장이었다. 그는 민족주의적인 교회의 영향 등으로, 금기시되었던 우리말 소설과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정주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만난 정품인 선생과 고단한 운명을 말없이 견디며 신앙심으로 살아간 어머니, 그리고 교회는 신앙인이자 꼿꼿한 지식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지명관에겐 삶의 푯대였다. (“분명히 내 삶은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들이 산 것이다.”)
하지만 정 선생과의 인연은 해방과 뒤이은 공산주의 세상에 이르러 비극적으로 단절되고 만다. 북쪽 공산주의 체제의 실상에 회의를 거듭하던 지명관은 투철한 공산주의자였던 정 선생과 치열한 논쟁을 벌인 후 결별하고 만다. 정 선생과의 만남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북한 체제에 절망한 지명관은 결국 1947년 3월 황해도 해주에서 배를 통해 삼팔선을 넘지만 미군이 진주한 남쪽 역시 이상향은 아니었다. 명목상으로는 독립국가였지만 일제의 잔재는 청산되지 않고 남아 있었을 뿐 아니라 지배자들은 외려 구질서를 유지하는 데 골몰하는 형편이었다. 이상주의적인 젊은 청년들은 남에서는 북을 북에서는 남을 동경하였지만 현실은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그들을 배신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이 시절 군에 입대해 5년을 복무하며 겪은 비극적인 경험은 헤아릴 수조차 없다. 전선에서 무수한 젊은이들이 죽어갔지만 권력자들과 그 자식들은 후방에 구경꾼으로 남아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전쟁으로 땅과 인간이 황폐해가는 참상에 절망한 그는 되묻는다.
“전쟁이라는 극도로 비인간적인 행태 속에서 제 한몸 보전해 살아남은 우리들이 온전한 정신일 수 있을까?”
4·19 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는 지명관이 저널리즘을 통한 사회참여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군사 쿠데타 이후 학교에서 쫓겨난 그는 『사상계』 주간으로 일하며 군사정권에 더욱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당시 사상계를 이끌던 장준하에 대해 지명관은 이렇게 회고한다.
“장준하는 내가 인생에서 만난 가장 고결한 인격자였다.”
군사정부의 탄압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도 망명 애국지사의 꼿꼿한 풍모를 잃지 않았던 장준하와 『사상계』는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치열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한일협정 체결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지명관,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 등 세 사람을 일본에 보낸다. 싫든 좋든 일본은 우리와 끊을 수 없는 관계이고 앞으로는 일본을 알아야 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지명관은 일본을 방문했고, 다시 미국과 중동 지역을 둘러보며 막연한 이미지로만 알고 있던 일본과 미국 그리고 세계의 실상을 깨닫게 된다. 물론 이 모든 깨달음은 당시 가난과 독재에 시달리고 있던 조국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미국에서 마틴 루서 킹과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하던 시절, 한국에서는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통과시키고 영구
집권 체제를 다지고 있었다. 지명관은, 빛은 보이지 않고 숨이 막히는 현실에서 눈을 돌려 일본 유학을 결정하고 한국을 떠난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우연히 재회한, 전 『세카이世界』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의 권유로 시작된 ‘통신’은 이후 무려 15년간, 한국에서 독재정권이 물러가기까지 지속되었다. 유신의 철권통치하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던 시절, ‘통신’은 한국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한국 민주주의에 연대한 세계의 움직임을 다시 한국 안으로 전했다. 한국 민주주의는 국내에서 목숨 바쳐 투쟁한 수많은 민중들에 의해 쟁취된 것이지만 이렇게 보이지 않는 전 세계인들의 응원과 도움에 힘 입은 바 역시 컸다. 이러한 국제적인 연대를 통해 정치적 변혁을 이루어냈다는 점에서도 당시는 획기적인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은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1973년 일어난 김대중 납치사건은 한일관계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김
대중의 목숨이 또다시 위태로워졌을 때 일본에서는 거의 거국적으로 “김대중을 구출하라”는 목소리가 세차게 일어났던 것이다.
197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을 말할 때 기독교회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박정희는 자신의 독재체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좌익으로 몰아 탄압했기에 민주화운동은 교회에 그 근거를 두어야 했다. 전 세계 교회와 연대한 운동까지 좌익으로 몰아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후 민주화운동은 소수의 선도적인 지식인들로부터 점차 일반 시민에게로 확산되어갔다. 도쿄에 근거를 둔 ‘통신’은 이러한 운동을 바깥 세상에 전하는 한편 국내 운동가들을 부단히 격려하고 영감을 불어넣었다. 부활절의 남산 야외음악당 사건 등은 통신을 통해 구상되고 실행되었던 것이다. ‘통신’은 결국 역사 속에서 수없이 입증되었던, 진실을 담은 말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결국 1979년 심복의 총탄에 쓰러졌다. 전두환 일당은 광주의 저항을 공수부대를 동원해 짓밟고 다시 한번 철권통치를 이어갔지만 역사의 물길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민주주의는 회복되었고 지명관은 20여 년간의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1993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파란 많은 세월 동안 그는 평생의 벗들과 이별해야 했다.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결별한, 평생 잊지 못하는 정품인 선생, 사상계를 창간했던 장준하, 고향 선배이자 소설가인 선우휘, 전 세카이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 등이다. 이들이 지명관이라는 인간을 있게 했다면 이들을 포함해 이 책 행간에 숨어 있는 숱한 사람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쓰러져간 사람들, 4·19 혁명과 광주민중항쟁 등 민주화 투쟁의 와중에서 꺾인 사람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늘에서 한평생 살아간 사람들이 오늘의 역사를 만들었다.
우리 역사는 미완의 역사이다. 혁명은 완수되지 않았고 식민과 독재의 그림자는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 계층간, 지역간, 남북간 화해와 평등 역시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특히나 형제가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적인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것이 불과 50여 년 전 일이다. 과연 어찌하면 상대를 말살해버리려는 이 가증스런 욕망을 제어하고 화해와 협력, 관용의 큰 바다로 나아갈 것인가? 이 물음에 답을 할 수 없다면 역사는 비극으로 다시 되풀이될지도 모른다.
중고단행본
바보 빅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