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백 년 전통의 줄다리기 고장인 충남 당진 틀못시마을을 배경으로, 시골을 찾아온 도시 아이들의 이야기입니다. 낯설면서도 친숙한 전통문화 줄다리기에 참여하면서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쌓여 있던 갈등을 풀어 나갑니다. 실존하는 시골 마을의 생생한 풍경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줄다리기 경기가 실감납니다. 또 시험관 아기이면서 ‘줄동이’인 주인공 진세를 통해 전통문화와 현대문화 사이에서 아이들이 겪는 갈등을 재미있게 보여줍니다.
줄다리기 줄을 달여 먹으믄 틀림?는 거여. 애가 들어서고말고.
진세는 시험관 아기로 태어났지만, 할머니는 고향 틀못시마을의 줄다리기 줄을 진세 엄마에게 달여 먹인 덕에 진세를 얻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진세는 ‘줄동이’라는 자신의 애칭과 그 의미를 친구들에게 숨기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하필이면 앙숙인 승기가 그 사실을 알아 버립니다. 시험 성적 때문에, 그리고 둘이서 동시에 좋아하는 인혜 때문에 티격태격하던 두 아이는 인혜, 영호, 진희와 함께 틀못시마을의 줄다리기를 구경하러 가게 됩니다. 생소하지만 신비로운 마을굿, 틀못시마을에서 만난 친구 정한이의 실종 소동, 그리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줄다리기 놀이에서 어우러지며 어느새 맺힌 감정은 풀려갑니다. 이제 진세는 ‘줄동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창피해하지 않게 되고, 진세를 놀려 대던 승기도 ‘말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외숙모, 나 복제 양 돌리나 뭐 그런 건 아니죠?
진세와 친구들은 말투를 보나 행동거지를 보나 때로는 깜찍하고 때로는 얄미울 정도로 조숙한 요즘 애들이고, 도시 아이들입니다. ‘줄동이’라는 이름을 “씨이, 미신이야.”라며 부끄러워하는 진세만 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모든 일에 순진하게 반응하기도 합니다. ‘시험관 아기’가 무엇인지 몰라서 끙끙거리며 고민하는 진세의 모습은 웃음을 자아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웃을 수만은 없습니다.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점점 살아나고 있다지만, 텔레비전이나 책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생활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과거의 풍습들은 종종 미신으로 치부되곤 합니다. 줄다리기 줄을 달여 먹으면 아기가 생긴다는 말은 물론 과학적으로 맞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두 줄의 만남에서 암줄과 숫줄, 음과 양의 조화를 보았던 조상님들에게는 나름의 가치를 지닌 이야기가 아니었을까요? 현대 과학이라고 무조건 믿는다면 미신과 무엇이 다를까요? 미신이건 과학이건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고,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따뜻한 마음인 것이죠. 그 마음을 배울 수 있다면 시험관 아기이든 줄동이이든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그래서 진세는 점점 ‘줄동이’라는 이름을 부끄러움 없이 받아들여가는 것이지요. ‘줄동이’라는 이름에 담긴 조상님들의 간절한 기원, 할머니의 자신에 대한 애정과 염려를 볼 수 있게 되었기에.
힘을 합쳐 옳은 길로 함께 나가자는 거지, 암, 본시 줄다리기의 뜻이 그거여.
눈썰매장에서 우연찮게 승기와 벌이게 된 줄다리기 한판, 그리고 승기의 끈질긴 복수심, “너와 나는 만난 것부터가 줄다리기였어.” 라는 말이 아니었다면 진세가 아빠 고향의 줄다리기를 보러 갈 일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아이들이 겪게 된 것은 무엇인가요? 줄을 꼬면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는 줄다리기, 그 굵은 줄을 보면서 아이들은 그 전통과 정성의 무게에 압도됩니다. 그리고 ‘한 가닥에 수십 명이 붙어서 당긴다’는 곁줄을 한 아름씩 안고 ‘개미처럼 바글바글 붙어’ 곁줄을 다는 마을 사람들을 보면서 아이들은 이것이 단순히 줄을 ‘당겨’ 이기고 짐을 정하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상대편 줄에 쇳조각을 던지고 양잿물을 뿌린다는 소위 ‘해코지’도 반장난처럼 드러내놓고 일어나 양쪽 마을 사람들의 또 다른 재밋거리가 될 뿐입니다. 게임 씨디를 미끼로 시험 문제에 대해 헛소문을 퍼뜨리면서까지 일등을 하려 했던 치사함, 억지로 친구들을 두 편으로 갈라 승부를 내려고 했던 옹졸함은 ‘물윗줄과 물아랫줄이 한데 섞이고 암줄과 숫줄이 함께 섞여’ 노는 줄다리기 뒤풀이 앞에서 부끄럽기만 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 아옹다옹거렸는지, 왜 그리도 이기고 지고에 집착했는지. 하지만 오랜 앙숙 관계가 하루아침에 살갑고 정겹게 될 수는 없는 법. 승기는 미안하다느니 친하게 지내자느니 하는 말 대신 ‘줄동이’와 짝을 이루는 ‘말동이’가 되겠다고 함으로써 진세와 화해를 합니다. 그걸로 충분해요. 온 힘을 다해 줄을 다리면서, 호흡을 맞추고 체온을 나누면서, 둘의 마음은 이미 말이 없이도 통했을 테니까요. 승기가 진세에게 달라고 하는 줄 한 가닥. 그것은 아마도 마을 사람들의 너르고 정겨운 마음씨의 한 조각을 얻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진세와의 우정을 지켜 주는 부적처럼 말이에요.
중고단행본
바보 빅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