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살 난 네모는 어느 날 교통 사고를 당해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달리거나 말하는 등 가장 기본적인 것 빼놓고는 부모도, 가장 친한 여자 친구 수니타도 알아보지 못하고 감정도 상실한다. 외계에서 지구에 똑 떨어진 아이처럼 네모는 세상을 전혀 모르는 백지 상태에서 다시 경험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열한 살짜리 아이가 알아야 할 기본적인 지식―자신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 인간의 신체 구조는 어떠하며, 가족은 누구이며, 조국은 어떤 나라이며, 자신이 속한 지구와 인류는 어떤 문명과 역사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 등등`―`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적인 것 외에도 어떻게 감정을 되살릴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까 하는 문제 역시 네모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네모는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일하는 가스파르 형이 진행하는 <지구는 우리 것>이라는 토론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계기로 그와 함께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텔레비전 편성국장이 네모가 여행을 하면서 세계를 재발견하는 모습을 방송으로 제작하자고 제의한 것이다.
산과 바다, 피크뒤미디의 천문대, 라스코 동굴, 이집트의 피라미드, 로마의 유적지, 마들렌 대성당,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적이 남아 있는 클로뤼세 성, 베르사유 성,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했던 므뉘플레지르 강당, 19세기 산업혁명의 역사적 현장, 세계대전의 참호, 의사당 등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역사의 현장과 유적지를 둘러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네모는 인류의 역사와 문명, 문화를 발견하고 인간의 생활과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가스파르와 그의 여자 친구 레아를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깨닫게 된다. 한편, 여행 도중 네모와 가스파르는 수니타의 실종 소식을 전해 듣는다. 어머니가 일자리를 잃어 모국인 인도로 돌아가려 하자 수니타는 이를 거부하고 사라진 것이다. 수니타의 어머니와 주위 사람들은 네모가 무언가 알고 있을 거라고 네모에게 기대를 걸지만, 네모는 수니타가 자기의 여자 친구였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긴 여행을 마친 뒤 네모는 미술 전시장을 둘러보고 음악회에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으며 감정의 동요를 느낀다. 네모는 음악에 완전히 도취되어 감격하고 볼에 뜨겁고 촉촉한 것이 흘러내리는 것을 발견한다. 눈물이었다. 네모는 마침내 그토록 되살리려고 했던 ‘인간의 감정’을 되찾은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날 네모는 꿈을 꾼다. 수니타와 함께 놀던 어린 시절과 교통사고가 일어났던 순간이 고통스럽게 되살아나는 꿈이었다. 기억을 되찾은 네모는 퍼뜩 수니타를 떠올리고 부모님과 함께 수니타를 찾으러 간다. 사고가 나기 전 수니타와 둘이서 숨어 있기로 약속했던 장소가 생각난 것이다. 수니타는 무사히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고, 수니타의 어머니가 가스파르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구했기 때문에 인도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기쁜 소식을 듣는다. 네모의 친구와 친척들은 네모의 집에 모여 네모를 축하해 주며 만찬을 벌인다. 그리고 몇 주일 뒤 많은 사람들이 네모와 가스파르가 찍은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텔레비전 방송국에 마련된 시사회에 참석한다. 여행을 하는 동안 가스파르가 촬영했던 사람들도 모두 초대를 받아 참석했다. 영화의 제목은 <네모의 기억>. 가스파르는 영화를 보기 전에 네모에게 공개적으로 고백한다.
“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너한테 이런 얘기를 해 주고 싶구나. 너와 함께 한 이번 여행이 정말 즐거웠다고. 난 여러 나라를 가 봤고 기이한 사람들도 많이 만나 보았다. 하지만 너와 함께 한 체험이 아마도 내 생에서 가장 풍요로운 경험일 거야. 네가 나한테 배운 만큼 아마 나도 너한테서 배웠을 거야.”
가스파르는 네모를 둘러싸고 있는 친구들에게도 말한다.
“여러분은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알기 때문에,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참된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여러분 말에 더욱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모든 이유로 내 친구가 돼 버린 네모 너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구나.”
영화는 네모와 가스파르의 여정을 따라 여행을 되새기고, 또 어떤 식으로 네모가 자기 정체성을 되찾아 가는지 보여 준다. 훌륭한 영상과 네모가 엉뚱하게 벌인 에피소드, 네모가 하나씩 깨달아 갈 때마다 보인 반응과 표정 등이 때로는 관람객들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하고 코끝을 찡하게도 만든다. 그리고 이집트의 피라미드 앞에서 한 노교수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네모, 네가 여러 신들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이 곳에 날 보러 왔을 때, 넌 이렇게 말했지. ‘난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어요…….’ 네가 떠난 뒤 그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네 친구 가스파르의 도움으로 너한테 이런 얘기를 해 주고 싶다. …… 어린아이일 때는 사실 자신이 누구인지, 뭐가 될지 잘 알 수가 없단다. 어른을 닮고 싶지는 않아도 무럭무럭 크고는 싶지. 먼저 이 말을 해 주고 싶구나. 너무 많이 변하지 마라, 네모. ‘남들’과 똑같이 되지는 마라. 끊임없이 ‘왜’, ‘어떻게’ 하고 질문하도록 해라.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질문하는 것이 대답보다 더 중요하단다. 질문이 바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야. 너는 막 기억을 되찾았고, 네 또래 아이가 알아야 하는 것도 재발견했어. 그래도 너는 계속 배워야 한다! 우리는 평생 생각하고, 아름다운 것과 참된 것을 추구하며, 우리 자신이 되는 법을 배운다. 너는 네모야. 특히 너는 네모가 될 거야. 너는 평생을 통해 참된 네모가 되어 갈 거야. …… 어떻게 너 자신이 될까? 너를 좋아하고 네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따라서. 또 네 영리한 머리를 활용하고, 네 감정을 표현하고, 네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그렇게 될 거야. 네가 어려울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는 네 본심을 찾아봐라. 겁쟁이인 네모 말은 듣지 마라. 겁이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남들처럼 하고 싶어하는 네모 말은 듣지 마라. 그런 네모는 좀 나약하고, 때로 너는 그런 네모를 부끄러워할 테니까. 한층 더 깊이, 네 속 아주 깊숙이 파고들어가 봐. 아주 평온한 그 곳에서 너는 늘 진실만 말하는 조그만 네모를 발견하게 될 거야. 그런 네모를 믿어라. 다른 어떤 네모도 그런 네모를 대신해 결정하게 하지 말아라. 너는 이 세상이 너무 크고 지나치게 냉혹하고, 부당한 일과 불행이, 또 고통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그래도 너는 행동할 수 있어, 네모! ‘나는 혼자이고 아주 어린데 뭘 할 수 있을까요?’ 하고 내게 되묻겠지. 지구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혼자고 작은 존재야. 너는 자유로워. ‘아니오!’ 하고 말할 자유가 있어. 더욱 인간답게 살려고 남들과 힘을 합쳐 싸울 자유도 있어. ‘누구랑 함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마라. ‘그렇다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이들은 스스로 방호벽을 쳐 놓은 사람들이며, 자기네 진심을 따를 줄도 몰라. 너 대신 널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고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사람들 또한 조심해라. 이런 사람들이 성실한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들이 하는 말을 듣기 전에 그들이 하는 짓을 봐. 말은 속일 수 있을지라도 행동은 언제나 진실을 말한다. 이 사실을 명심하도록, 네모. ‘행동은 진실을 말한다.’"
중고단행본
바보 빅터
